"법, 왕권강화 수단 아냐" 조희대가 세종대왕 소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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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국제콘퍼런스 개회사 발언에 與 맹폭
조 대법원장, 2013년부터 유명한 세종 전문가
한글 창제 주된 목적 '백성들의 재판권 보장'
세종 "국왕도 법 아래 존재" 법 앞의 평등 강조
  • 등록 2025-10-09 오전 7:13:58

    수정 2025-10-09 오전 10:36:38

[이데일리 백주아 성주원 기자] “세종대왕(1397~1450년)께서는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수단이 아니라 백성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규범적 토대로 삼으셨습니다. 백성을 중심에 둔 세종대왕의 사법 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법의 가치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축사를 하며 한글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대법원이 개최한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에서 한 말이 도마에 올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대선 개입 의혹’을 앞세워 조 대법원장 사퇴를 강하게 압박하는 시점, 조 대법원장이 이재명 정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게 아니냐는 정치권의 공세가 이어졌다.

같은 날 김현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세종대왕의 이름을 빌려 국민의 정당한 사법개혁 요구를 ‘왕권 강화’로 매도한 것에 대해 즉각 사과하라”고 비판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같은 달 24일 “조희대의 세종대왕 끌어다 쓰기는 자기 죄를 덮기 위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조 대법원장의 발언은 A4 용지 기준 8페이지에 달하는 개회사 중 행사의 첫 세션 주제 ‘뿌리 깊은 법치: 지속 가능한 정의를 위한 사법의 길’ 코너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온 것으로, 즉석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었다. 행사를 준비한 대법원으로서는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9년 만에 개최한 국제 학술대회의 핵심 메시지는 외면당한 채 대법원장의 말이 정치권의 공격 재료로 소비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감추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조희대(왼쪽) 대법원장과 크리스토퍼 스티븐슨 세계은행(World Bank) 선임 부총재가 대법원이 지난달 2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한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세번째 세션에서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백주아 기자)
◇ 조 대법원장, 2013년부터 세종 업적 알리기 힘써


‘대법원 행사에 세종이 뜬금없이 왜 나오냐’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세종의 법사상은 법학계에서 깊이 주목받아 온 연구 주제다. 세종은 한글 창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또 다른 면모인 ‘재판관으로서의 세종’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 세종은 탁월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판결과 법적 개혁은 조선 법제의 근간을 형성했다. 조 대법원장이 중국·일본·싱가포르·필리핀·호주·그리스·이탈리아·라트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몽골·카자흐스탄 등 세계 각국 법조인 앞에서 세종을 이야기한 이유다. 행사 당일 조 대법원장은 준비된 프리젠테이션(PPT)을 통해 17개 자음과 11개 모음 등 28개 글자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원리를 직접 소개했다.

조 대법원장의 세종 사랑은 법원 안팎에서 굉장히 유명한 얘기다. 지난 2013년 10월 대구지방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알기 쉬운 판결서 작성을 위한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쉬운 법률용어 사용과 판결서 작성은 국민에 대한 당연한 의무이고 법원의 신뢰 회복을 위한 국민과 소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며 세종의 한 일화를 소개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32년 11월 7일 세종은 형법을 한자를 우리말 형식으로 표기하는 이두(吏讀)로 바꿔 반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조판서 허조는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일어날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에 세종은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옳겠냐,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범법 한 자를 벌주게 되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라며 허조를 꾸짖었다.

실제 많은 현대인들이 세종의 한글 창제를 문화적 업적으로만 알고 있지만 세종이 1443년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한 배경에는 ‘법률 접근성’이라는 사법적 목적이 있었다. 세종은 ‘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표현된 서민이 재판에서 억울한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하려고’ 한글을 만들었다.

당시 백성은 한문으로 된 법전의 내용을 알지 못해 법령을 위반해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은 백성이 죄를 모르고 범하는 잘못으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 체계를 창제했다. 이는 법령의 홍포(弘布, 널리 알림), 즉 효과적인 법령의 고지를 통해 범죄를 방지하고 백성의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고자 한 민본주의적 조치였다. 이두를 써서 한자로 된 법전을 역주하는 등의 노력도 있었지만 이두는 점차 백성과 간극이 벌어지고 서리(하급 관리) 층의 전문용어로 굳어졌다. 이에 세종은 백성이 안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금령(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만이라도 어기지 않도록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던 것이다.

한글날인 지난 2023년 10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화환이 놓여 있다. (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권력자 엄중 처벌한 재판관 세종, 법 앞의 평등 강조

세종은 ‘죽은 자가 지하에서 원한을 품지 않고 산 자 역시 마음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는 것’을 재판의 목표로 삼았다. 이 같은 원칙은 1431년(세종 13년) 전국 관아에 내린 ‘휼형교지(恤刑敎旨)’에 담긴 ‘옥송8칙(獄訟八則)’에 집약돼 있다.

교지에서 나오는 ‘법 맡은 관리가 지켜야 할 7가지 원칙’은 오늘날 법조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을 준다. 세종은 재판관들에게 △자기 의견에 구애되지 말고 △들은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남들을 따라 부화뇌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오랜 인연이나 옛날 방식에 얽매여 머뭇거리지 말고 △죄수의 쉬운 자백을 기뻐하지 말며 △판결서를 서두르지 말고 △다방면으로 사안을 따져보고 되풀이해서 구해낼 방도를 찾으라고 강조했다.

세종은 법전 편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422년 ‘속육전(續六典)’의 편찬을 위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해 법전 편찬에 착수했다. 1433년에는 ‘경제속육전’을 완성했다. 또 중국의 주석서를 참고해 우리 고유의 주석서인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를 편찬했다. 기계적 적용이 아닌 조선의 현실을 고려한 법제 구축에 힘쓴 결과 세종 17년에 이르러 법전의 정비 사업이 완결됐다.

세종은 인권 보호에도 앞장섰다. 1426년에는 ‘옥도(獄圖, 감옥 설계도)’를 배포해 남녀 죄수를 분리하고,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양옥(凉獄)’을, 겨울에는 따뜻하고 보온이 잘 되는 ‘온옥(溫獄)’을 설치하도록 했다. 또 취약계층에 대한 특별한 보호 조치도 마련했는데, 70세 이상 노인과 15세 이하 어린이는 살인, 강도죄를 제외하고는 구금을 제한했고 여성과 임산부에 대해서도 특별한 법적 보호를 제공했다. 재판의 신속함도 중시해 ‘결옥일한(決獄日限, 형사사건 판결 기한)’을 설정해 사형수에 대한 재판도 1개월 이상 지체되지 않도록 했다. 수인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여 옥중에서 양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병든 죄수에게는 의원을 파견하는 등 인도적 대우를 보장했다.

세종은 공정한 재판 후 엄정한 판결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종 시대의 사죄(死罪,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 판결 기록을 보면, 세종은 32년 재위 기간 동안 연평균 32건의 사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정조 때(연평균 93건)보다 적은 수치지만, 세종이 사죄 사건에서 감형 판결을 내린 경우는 71건으로 13%에 불과했다. 반면 정조는 사형에 해당하는 전체 범죄 1112건 중 36명(3.2%)만 최종적으로 사형을 선고했고, 대부분 감형(44%)이나 석방(30.8%) 했다.

특히 세종은 공권력에 저항하거나 고위공직자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 더욱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권력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한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후 체포를 거부한 이준경, 김독동 등이나 체포에 항거하다 살인한 사노 와도처럼 공권력에 저항한 경우 대부분 참형에 처해졌다. 세종의 이러한 엄정한 접근은 억울함 없는 공정한 재판 과정을 전제로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노력이었다.

무엇보다 세종은 “법은 천하의 공기(公器,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이용하는 도구)로 국왕도 법 아래에 존재해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실천했다. 국왕이 법의 집행자임과 동시에 법을 준수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법 앞의 평등’ 원칙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추구한 ‘억울함 없는 판결’, ‘인권 존중’, ‘법 앞의 평등’은 현대 사법 제도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조 대법원장, 지난해 첫 해외 순방서도 세종 업적 알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10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9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 폐회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오는 2026년 제20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가 지난 1999년 및 2011년에 이어 15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열린다.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대법원장들이 모여 각국의 사법제도와 사법 선진화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이해 증진 및 지역 평화 유지에 공헌하며 사법 협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2년마다 개최되는 회의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해 10월 첫 해외 순방으로 제19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 참석해 세종의 법치주의에 관한 연구 성과를 세계 각국과 공유한 바 있다. 조 대법원장은 당시 폐회식 연설에서 세종의 법 정신에 관한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상호 협력하는 것이 범 국제적 차원에서 법치주의와 정의를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도 전달했다. 또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한 성과를 기반으로 제20차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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