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의 힘으로 다시 새긴 역사 [국현열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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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한길 민중미술 대가 '신학철'
'역사 주체는 민중' 평생 신념 기록
AG 전위예술 참여한 초기 활동 뒤
대중과 동떨어진 실험미술에 회의
"예술은 민중 삶과 분리될 수 없어"
산업·근대화서 밀린 노동자·농민으로
사회현실 고발한 완성도 높은 회화
탄탄한 구도·묘사, 날선 시대질문도
  • 등록 2025-10-10 오전 7:40:00

    수정 2025-10-10 오전 7:40:00

신학철의 ‘한국근대사-종합’(1982∼1983). 민중미술운동에 합류하며 제작한 작가의 역사화 연작 중 하나다. 사진에서 차용한 이미지로 한국 근현대사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여성의 신체, 남근의 묘사 등을 결합한 폭력적이고 섹슈얼한 이미지는 작가가 근현대사를 형상화할 때 자주 사용한 도상이다. 작품 하단에 한국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와 비극적 사건 이미지가 서로 엉겨 붙었다가 상단에서는 남녀의 키스로 이어지는데, 이 흐름에서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결말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려 한 작가의 바람을 읽어낼 수 있다. 세로로 긴 캔버스 두 개를 연결한 작품이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한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 나왔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389.2×130㎝(위 129.7×130㎝, 아래 259.5×130㎝).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

[정하윤 미술평론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화가 신학철(82)이 평생 붙잡아온 신념이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그는 늘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현실을 화폭에 옮기며 그들이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담아 왔다.

194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신학철은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진학하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미대 졸업장이 전업화가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경기 화성·안양 등지의 중·고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동시에 작품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창립해 1975년까지 활동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AG 전’에 참여해 보다 실험적인 성격의 미술을 선보였다.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회화를 벗어나 퍼포먼스나 설치미술 등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신학철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양한 매체와 형식으로 작품을 실험하며 전시에 내보였다.

하지만 신학철은 이 과정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실험미술’이라 불리던 작업들이 일반 대중과 너무 괴리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새로운 양식만을 추구한다면 과연 미술을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고민했다. 그에게 미술은 소수 전문가나 교육받은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성찰은 한 가지 확신으로 이어졌다. 바로 “민중의 삶과 예술은 결코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깨달음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민중미술’로.

“미술은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게 아니야”

1980년대 우리 미술사의 큰 줄기를 이룬 민중미술은 단순한 예술 사조라기보다 민주화 운동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던 사회적 실천이었다. 정치적 통제와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민중미술가들은 예술이 사회적 현실과 단절돼서는 안 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민중미술 안에는 각기 다른 개성과 노선을 지닌 작가들이 존재했다. 어떤 이는 전시장에서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선보였고, 다른 이는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된 신념이 있었다. 바로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란 믿음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중미술가들은 기존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택했다. 민중이 알아보고 공감할 수 있는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신학철의 ‘신기루’(1984). 도시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나가는 이농을 표현한 작품이다. 화면을 아래·위로 이분화해 하단의 리얼한 현실과 상단의 허황된 동경이 적나라하게 대비되도록 구성했다. 1980년대 작가는 산업사회·소비사회에서 끌어낸 일상의 암울한 상황을 구체적인 실체를 들여 비판하고 풍자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72.5×6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70년대 실험미술가들이 선호하던 퍼포먼스나 설치미술, 광복 이후 한국미술을 주도했던 추상화는 모두 배제했다. 대신 신학철처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구상적 이미지, 곧 민중의 눈높이에서 읽히는 그림을 택했다. 그림을 배우지 않았어도 글을 읽지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선명하고 직관적인 방식이어야 했다. 민중미술에서 예술은 더 이상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또한 민중미술가들은 미술의 사회적 책무를 중요시했다. 현실과 무관하게 예술의 새로운 형식이나 ‘아름다움’만을 우선시하는 작품은 그들에게 무책임한 것으로 여겨졌다. 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그들을 포함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 이것이 민중미술가들이 생각한, 예술가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책임이었다. 그들의 미술은 곧 사회적 도구였으며 작품의 미학적 아름다움보다 사회적·정치적 ‘메시지 전달’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점에서 민중미술은 이전과는 결을 달리하는, 전혀 새로운 미술이었다.

추상화·실험미술이 담아내지 못한 삶 기록

이 흐름 속에서 신학철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으로 나섰다. 1987년 민족미술협의회 2대 공동대표를 맡아 지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했고, 동시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와 민족미술인협회의 일원으로서 꾸준히 연대했다. 그의 그림은 민중미술의 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급류 속에서 뒤로 밀려난 농민과 노동자가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그들의 굽은 허리와 거친 손은 추상화나 실험미술이 담아내지 못한 삶을 기록했다.

특히 신학철은 역사의 기록에서 철저히 배제된 이들, 이름 없는 민중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화를 많이 그렸다. ‘한국근대사-종합’(1982∼1983)은 그 대표작이다. 공식 기록에 일일이 남지 않는 이들의 얼굴과 몸짓이 신학철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비로소 역사의 주체가 됐다. 권력자 중심으로 기술하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역사화였다.

신학철의 ‘일하는 사람 7’(1991). 모내기를 하기 전 써레질을 하는 농민의 모습이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방식을 기본으로 포토 리얼리즘을 구사한 작가는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렸다. 작품은 벼의 새싹이 잘 자라도록 필요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써레질을 빗대 현실사회를 깨끗이 정화하는 모습을 은유한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6.5×9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m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다 보면 형식이 흔들리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사회적 구호와 문제의식을 앞세우다 보면 작품의 완성도나 기법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경우도 있다. 민중미술 내부에서도 이러한 자성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그림이 세련된 조형성을 갖추지 못하면 보는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반성이었다.

그러나 신학철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워낙 사실적 표현에 능했기에 관람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저절로 눈길을 붙드는 탄탄한 구도와 묘사력, 그 안에 스며 있는 날카로운 시대적 질문이 그의 그림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신학철의 작품은 사회적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회화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았다. 그는 민중미술가 가운데서도 메시지와 형식을 동시에 지탱해낸 독보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 그 어느 쪽도 희생하지 않고 두 축을 함께 굴려낸 힘 있는 미술이었다.

1987년 통일미술전 출품한 ‘모내기’로 구속되기도

때로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권력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전’에 출품한 ‘모내기’(1987)가 그 사례다. 검찰은 작품이 북한의 선전논리를 담고 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작품은 꼬깃꼬깃 접혀 압수당했고 신학철은 구속됐다. 이후 그는 징역 10개월의 선고유예를 받으며 3개월간 구치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예술이 곧 사회적 발언이던 시대, 이 사건은 예술과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대표적인 경우로 남았다.

신학철의 ‘할미꽃’(1995). 힘없는 자들의 드러나지 않은 힘에 주목한 작가가 나아가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 산천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눈길을 끌지 못하는 할미꽃에서 거친 땅을 뚫고 나오는, 어떤 역경에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민중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누구에게서 나오는가를 묻는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53×72.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럼에도 신학철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힘없는 존재들을 향했다. ‘할미꽃’(1995)은 이러한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할미꽃은 우리 산과 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지만 눈길을 끌 만큼 화려하지 않다. 신학철은 그 평범한 꽃이 거친 땅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어떤 역경에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민중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점에서 그의 ‘할미꽃’은 여전히 민중의 얼굴이자 삶이었다. 아마 화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을 거다. 화필을 잡고 걸어온 긴 여정 동안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끝내 예술이라는 꽃을 피워냈으니 말이다.

이처럼 신학철의 붓끝은 언제나 권력자가 아닌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신념을 기록해 왔다. 그 오랜 궤적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지난 역사이기만 할까. “민중미술은 지나간 시대의 구호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되새겨야 할 질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누구나 광장에 나가 정치적 견해를 자유로이 표출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산다. 민중보다 ‘대중’이나 ‘시민’이란 단어가 익숙한 시대다. 하지만 신학철의 그림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과연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그의 바람처럼 진정 ‘할미꽃’들일까.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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