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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를 위협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한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중정이 나서서 그를 납치하고 죽이려했다.
납치된 김대중은 공작선 용금호에 태워져 먼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간과한 게 있었다. 김대중의 위치를 미국 CIA가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해협에 있던 김대중을 미상의 비행기가 찾아냈고 납치 129시간 만에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풀려났다.
무엇보다 납치를 지시한 상부가 어디인지조차 엇갈린다.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는 물론이고 중정 부장이었던 이후락도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지시를 암시했다가 추후 말을 바꿨다. 다만 중정이 깊숙하게 관여했던 것은 확실하다.
살인 미수에 그친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안팎에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반대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고 종교인들도 개헌 청원에 나서는 등 반발이 거세졌다.
김대중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후에 “박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정치, 이래가지고는 절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강력히 가지고 있다”면서도 “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어떤 개인에 대해서도 내가 개인적인 원한이라던가 어떤 복수심은 영원히 갖지 않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