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트루먼쇼'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 등록 2021-02-18 오전 5:59:00

    수정 2021-02-18 오전 5:59:00

[정덕현 문화평론가] 설 명절에 혼자만 고향을 찾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집합 금지명령’으로 가족이라도 동거인이 아니면 5인 이상 모일 수 없게 돼서다.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나까지 넷이서만 차례를 지냈다. 형님은 집합 금지명령에 신고포상제가 시행되어 명령을 어기면 누구든 신고당할 수 있다면서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찰칵 찍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 카메라 일상의 시대. 누군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를 실감하게 됐다.

카메라가 이렇게 늘 우리 손에 들려 있고, 그래서 사진은 물론이고 동영상까지 쉽게 찍고 편집해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영상을 접하는 우리의 감수성은 달라졌다. 필름카메라를 쓰고 테이프를 넣어 찍는 비디오카메라가 등장한 후에도 우리에게 영상은 그리 일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방송이나 영화 속 영상들은 너무나 연출된 장면들이면서도 리얼하게 느껴졌다. 최근 우연히 1979년에 제작된 로저 무어 주연의 <007 문레이커>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세트 연출이라는 게 느껴져 놀란 적이 있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실감 나는 파격적인 액션과 우주 모험으로 여겨졌던 장면들이 아니었던가. 그만큼 그 영상이 진짜인지 아니면 연출자에 의한 연출인지를 이제 대중들은 뻔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감수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달라진 감수성으로 인해 최근 영상의 트렌드가 된 게 리얼리티쇼, 즉 우리식으로는 ‘관찰카메라’다.

물론 우리네 대중들은 누군가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관찰카메라에 대한 정서적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서구에서 리얼리티쇼가 일반인들의 침실까지 들여다보던 시절에도, 일반인 대신 연예인을 세우고 완전한 일상 속 리얼이 아닌 특정한 상황 속 리얼을 보여주는 일종의 ‘캐릭터쇼’를 했다. 그러다 육아예능이나 가족예능이라는 다소 불편함을 상쇄시켜주는 우회로를 타고 관찰카메라가 그 영역을 넓히더니, 현재는 내밀한 부부생활의 이야기부터 심지어 이혼한 부부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까지 방송의 대세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제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누군가의 일상공간에 설치된 카메라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장면들을 익숙하게 만날 수 있게 됐다.

이미 MBC <나 혼자 산다>나 SBS <동상이몽> 같은 지상파 프로그램들이 시도했던 관찰카메라는, 최근 들어 TV조선을 중심으로 한 종편 채널들이 가세하면서 그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수위가 높아지며 관심도 높아진 관찰카메라는 그만큼 야기하는 문제들도 키워놓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찰카메라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에서 최고기와 유깻잎 전 부부는 그 단적인 사례다.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함께 살아보며 이혼 전후로 몰랐던 새로운 부부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기획의도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이 프로그램은 이혼 또한 행복을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시작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 ‘재결합’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대중들이 들여다보며 개입하는 일종의 <트루먼쇼>가 됐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 건, 우리네 관찰카메라에서 또 하나의 틀로 자리 잡은 스튜디오에서 영상을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해 넣는 그 방식이 부추긴 면이 있다. MC들은 이혼했지만 여전한 그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는 ‘재결합’의 운을 띄웠고, 그건 시청자들에게는 일종의 참여 가이드라인처럼 작용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위기는 영상 속 ‘등장인물’들이 시청자들이 원하는 방향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불만을 토로하고 심지어 악플 피해가 발생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방송 출연자들은 일종의 ‘압력’을 받는 상황에 놓여졌다.

<우리 이혼했어요>의 사례를 통해 잘 들여다보면 관찰카메라가 결코 완전한 ‘진짜’일 수 없고, 무엇보다 방송을 통해 일종의 <트루먼쇼>화되면 그들의 삶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관찰카메라를 ‘리얼리티쇼’라고 부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설정된 리얼’일 수밖에 없다. 즉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에 들어가 있는 ‘다시 함께 살아보며’라는 건 실제 이혼 부부에게는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방송이 개입한 것이고, 그렇게 다시 만나게 한 후에는 스튜디오의 MC들의 토크가 더해져 또 한 번의 개입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방영된 영상은 시청자들의 개입을 만들고, 그건 실제 그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진짜일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일생이 그렇게 영상에 찍혀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까지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관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이를 의식하며 행동하게 된다. 관찰카메라는 의식하지 못할 때는 누군가의 개입이 들어와 그 일상에 영향을 주고, 의식하기 시작할 때는 그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든 ‘진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관찰카메라를 활용한 방송이나, <트루먼쇼> 같은 영화는 이제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길거리를 나서기만 해도 나를 비추는 무수히 많은 카메라들을 우리는 만난다. 엘리베이터, 차 안, 거리 그리고 건물 안에서조차 관찰카메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더 내밀한 공간까지도 우리는 늘 잠재적인 관찰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사생활을 찍어 자랑하듯 만천하에 공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독’하며 ‘좋아요’를 눌러 달라 애걸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새 저 관찰카메라 속 인물들처럼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그런데 이런 삶은 과연 괜찮은 걸까. 이 누군가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목숨을 걸고 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 순간마저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숨죽이며 바라본다. 하지만 트루먼이 빠져나오며 쇼가 끝나는 순간 사람들은 채널을 돌린다. 방법은 이것뿐이다. 가끔 카메라를 꺼두거나, 카메라의 시선을 벗어나는 것. 어쩌다 우리는 관찰카메라의 피로 속에 살아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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