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지상 강의 : ‘인더스토리Ⅲ’ 5강 바다(海) 1편
페니키아, 인류 해양 문명과 산업의 원조
바이킹·이슬람·베네치아, 바다 장악으로 패권 확보
향료 무역이 촉발한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 패권국 부상
  • 등록 2021-02-24 오전 5:15:00

    수정 2021-02-24 오전 5:15:00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Ⅲ’ 5강 ‘바다’(海) 1편을 강의하고 있다. ‘인더스토리’는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코너로 시즌3에서는 교통·물류산업을 집중 조명한다.(사진=김태형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우리는 모두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임규태 박사는 강연의 시작을 존 F. 케네디의 말로 시작했다. 바다를 이용하면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으며 어떤 물건이라도 실어 나를 수 있다.

임 박사는 바다는 세계를 연결하는 문명의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해양산업을 장악하는 것은 전 세계의 패권을 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더스토리 시즌3 ‘바다’ 편이 산업의 역사를 넘어 역사의 패권을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다.

페니키아와 페니키아 식민지의 위치


페니키아, 모든 해양 산업의 원류

페니키아는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현재 이스라엘 북쪽 레바논 지역에 자리 잡았던 소국으로 기록돼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현재 레바논인들의 직계조상이라 여겨지지만 인종적 구성은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어디서 흘러들어왔고 이후 어떻게 퍼졌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임 박사는 페니키아의 역사적 유래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페니키아인들이 후세에 끼친 영향이다. 페니키아인이 인류 해상 문명과 산업에 미친 영향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는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남쪽의 이집트 문명을 지중해를 통해 유럽에 전파했다. 그 과정에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중해 전역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해상 네트워크를 완성했다.

페니키아인들은 해양산업의 시초라 볼 수 있다. 선박을 만들고(건조), 이 선박을 이용해 바다로 나갔으며(항해), 새로운 땅에 도착해 물건을 사고팔았고(무역), 이 돈을 굴려 부를 축적(금융)했다. 그렇게 불린 자금으로 다시 배를 만드는 해양산업의 순환 구조를 완성했다. 또한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영향을 줬고, 그리스 문자는 라틴 문자로 바뀌어 현재 알파벳의 원형이 됐다.

알파벳의 기원
페니키아인은 고대 주력 선박이던 ‘갤리선’을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돛과 노젓기를 병행하는 갤리선은 초기에는 돛의 역할이 컸지만, 전함으로 사용되는 일이 많아지며 노젓기가 강화됐다. 지중해 국가들은 노를 젓기 위한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수행했다. 페니키아인은 키루스 대제에 의해 페르시아에 복속돼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이 맞붙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비록 그리스에 패하기는 했으나 페르시아 해군의 전력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사후 제국이 사분오열된 틈을 타 로마가 지중해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다.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카르타고와 세 번의 전쟁을 치른다. 로마와 카르타고와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 불리는데, 이 포에니는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킨다. 즉 로마는 카르타고를 페니키아인의 후예로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현재 튀니지 지역에 해당하는 카르타고와 한니발이 주둔했던 스페인은 모두 페니키아가 개척한 식민지였다. 페니키아는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다.

임 박사는 “바다에 관련된 모든 산업에는 페니키아인의 DNA가 들어 있다”라면서 “페니키아인은 인류의 해양 역사를 만들었고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인류는 페니키아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바이킹


바이킹, 이슬람, 베네치아 공화국… 끊임없이 변하는 해양 패권

카르타고를 누르고 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5현제 시기 이후 군인 황제 집권기를 거치며 급속히 쇠퇴했다. 306년 즉위한 콘스탄틴 대제는 그동안 탄압받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결국 로마는 동과 서로 갈라졌고, 이후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등으로 멸망하고 만다.

이후 서유럽은 기독교 중심의 중세시대가 시작됐다. 기독교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탐욕’은 죄악시 됐고 이에 따라 부를 불리는 무역과 금융업도 쇠퇴해 갔다. 무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해양산업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 바다에서 힘을 불린 새로운 강자 ‘바이킹’이 등장했다. 국가 단위가 아니라 소규모 부락 단위로 움직이던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정착한 뒤 유럽 내륙은 물론 영국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이미지로 알려진 것과 달리 탁월한 항해 기술을 지녔고, 내부 문제는 무력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해결했다. 바이킹의 이런 전통은 훗날 영국 의회제도에도 영향을 준다.

임 박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킹의 이미지는 바이킹에 침략 당했던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라면서 “그들은 통합된 정치체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했고, 이런 독특한 사고는 현대 북유럽 국가들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바이킹이 북에서 서유럽을 압박했다면 남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이 준동했다. 621년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이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곧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은 중동,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 제국은 상인이었던 무함마드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했으며, 동과 서를 잇는 중개 무역을 완벽히 장악했다. 지중해의 패권도 이슬람 제국의 몫이었다.

적으로 둘러싸인 서유럽은 결국 십자군 전쟁이란 강수를 뒀다.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큰 성장을 거둔다. 4차 십자군 원정에서 십자군을 레반트 지역까지 이송하는 계약을 체결했던 베네치아는 정작 십자군이 이를 지불할 돈이 없자, 이들을 지원 대상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약탈을 시켜 빚을 갚도록 했다.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원정에 따른 이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은 물론 무역을 방해했던 동로마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지중해의 패자로 급부상했다. 베네치아는 유럽의 무역은 물론 금융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임 박사는 “4차 십자군 전쟁 직후 베네치아에서 근대적 은행의 효시인 방코(Banco)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흑사병 창궐 당시를 묘사한 피테르 브뢰헬 죽음의 승리


“육두구를 찾아라” 대서양 개척에 나선 서유럽

1346년 유럽에서 발병한 흑사병은 곧 대륙 전체를 강타했다. 치사율이 50%가 넘는 이 질병의 대유행으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줄었다. 문제는 당시 흑사병의 치료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해 창궐했다는 점이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가운데 영국의 한 의사가 향료인 ‘육두구’가 흑사병을 막아준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유럽 각 국은 육두구 확보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육두구 산지로 알려진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을 오스만 제국이 철저히 막고 있다는 사실. 결국 유럽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육두구 산지를 찾는 여정을 떠나야만 했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 구형론’에 기반 해 서쪽으로 항해를 하더라도 동쪽의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그는 인도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신대륙을 발견했다.

포르투갈의 페르디난드 마젤란 탐험대는 스페인에서 출발해 남아메리카를 거쳐 필리핀에 도착한 뒤 아프리카 희망봉을 찍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옴으로써 세계 일주를 완성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바스쿠 다가마가 개척한 인도 항로
그보다 몇 해 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도달하는 ‘인도 항로’를 개발했다. 1511년 포르투갈 선원들이 인도 항로를 이용해 육두구의 산지였던 말레이시아 말라카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유럽 각국은 지중해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무역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됐다.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맞선 것은 영국·네덜란드(영란) 연합군이었다. 결국 영국-스페인 해전에서 영란 연합군이 승리함에 따라 동남아시아 향료 무역 주도권이 반(反) 가톨릭의 양 국가로 넘어갔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육두구 무역권을 일임했다. 네덜란드도 2년 뒤 동인도 회사를 세우며 이를 뒤따랐다.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는 합병을 논의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1623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향신료 제도라 불리던 말라카 제도에서 영국 상인들을 습격해 살해한 암보이나 학살 사건으로 등을 돌렸다. 말라카 제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영국은 인도로 눈을 돌려 후추 재배에 박차를 가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야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영국을 몰아낸 네덜란드는 1641년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공격해 무력으로 장악했고, 근처 나무를 베어내면서 육두구 공급을 철저하게 통제하려 했다. 임 박사는 “암보이나 학살사건과 포르투갈령 무력장악은 인간의 탐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탐욕의 끝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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