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눈에 박힌 16세 김주열 시체로...4.19 도화선 되다[그해 오늘]

1960년 4월 11일, 3.15 의거 참여 중 실종...27일 만에 어부 갈고리에 걸려 인양
김 열사 시신 발견에 마산 2차 의거 시작..전국 확대로 4.19혁명 시발점
김 열사 母, 시신 인수 거부하며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에 갖다 줘라"
마산상고, 1995년 4월 11일 김 열사에 명예 졸업장 추서
  • 등록 2023-04-11 오전 12:03:00

    수정 2023-05-25 오후 11:05:53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 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중략) 내 자식은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겁니다. 마산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1960년 4월 12일 ‘김주열 열사 사망 사건’을 최초 보도한 부산일보 당시 지면. 사진=부산일보.
16세의 생때같은 아들을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최루탄에 의해 잃은 어머니가 ‘마산의 아들’로 불린 아들 김주열을 대신해 마산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의 갈고리에 걸려 올라온 것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것은 바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어린 학생의 시체였던 것이다.

‘4.19 혁명’의 상징적 인물로 거론되는 고(故) 김주열 열사는 1944년 전라북도 남원시(당시 남원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열사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 열사의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아버지마저 병을 얻어 드러눕자 가세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김 열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에 합격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남원농고(현 남원용성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재수를 택했고, 이후 형의 친구 권유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원서를 내게 된다. 은행원이 돼 집안도 다시 일으키고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입시를 치르고 남원으로 돌아왔던 김 열사는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과 함께 다시 마산으로 내려가 이모할머니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마산상고의 합격자 발표 연기를 종용해 합격자 발표는 16일로 연기됐다. 당시 김 열사의 이모할머니는 열성적인 민주당 당원으로 자유당의 부정 선거로 투표 통지표를 못 받은 것에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가 드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시위(3.15 의거)를 하자 이를 본 김 열사의 이모할머니가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 보길 권유한다. 시위대에 합류한 두 형제 중 김 열사는 이후 행방불명됐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들은 김 열사의 어머니 권 씨는 곧장 마산으로 가 백방으로 김 열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들을 찾지 못한 채 남편의 병세가 깊어졌다는 소식에 4월 11일 아침 첫차를 타고 남원으로 다시 향한다. 그런데 권 씨가 남원으로 가는 도중이던 이날 오전 11시께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미국제 최루탄이 박힌 어린 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마산 시민들은 그 시체가 권 씨가 십수 일 간 마산에서 애타게 외쳐대던 “김주열”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실종 27일 만에 발견됐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김 열사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

시신이 김 열사로 확인되자 이승만 독재 정권에 의해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치부됐던 3.15 의거의 주역 마산 시민들의 울분은 다시 솟아올랐고 이로 인해 마산 2차 의거가 시작됐다. 이 2차 의거는 전국 각지로 퍼져 결국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장남 이강석의 권총에 의해 죽고,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다. 12년 간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이후 김 열사의 형이 김 열사의 마산상고 합격증을 대신 받았는데 김 열사는 장학생으로 마산상고에 합격한 사실이 확인됐다. 마산상고는 1995년 4월 11일 김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다. 김 열사는 1960년 4월 조국 민주주의 회복의 기폭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그렇게 고향 남원의 선산에 묻혔다.

경찰이 1960년 4월 당시 김 열사의 시신을 갖고 남원으로 찾아가 김 열사의 모친 권 씨에게 시신 인수증을 내밀자 권 씨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나는 시체를 못 받겠으니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기붕한테 갖다 주시오!”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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