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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의 갈고리에 걸려 올라온 것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것은 바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어린 학생의 시체였던 것이다.
‘4.19 혁명’의 상징적 인물로 거론되는 고(故) 김주열 열사는 1944년 전라북도 남원시(당시 남원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열사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 열사의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아버지마저 병을 얻어 드러눕자 가세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김 열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에 합격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남원농고(현 남원용성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재수를 택했고, 이후 형의 친구 권유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원서를 내게 된다. 은행원이 돼 집안도 다시 일으키고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들은 김 열사의 어머니 권 씨는 곧장 마산으로 가 백방으로 김 열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들을 찾지 못한 채 남편의 병세가 깊어졌다는 소식에 4월 11일 아침 첫차를 타고 남원으로 다시 향한다. 그런데 권 씨가 남원으로 가는 도중이던 이날 오전 11시께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미국제 최루탄이 박힌 어린 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마산 시민들은 그 시체가 권 씨가 십수 일 간 마산에서 애타게 외쳐대던 “김주열”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실종 27일 만에 발견됐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김 열사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
시신이 김 열사로 확인되자 이승만 독재 정권에 의해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치부됐던 3.15 의거의 주역 마산 시민들의 울분은 다시 솟아올랐고 이로 인해 마산 2차 의거가 시작됐다. 이 2차 의거는 전국 각지로 퍼져 결국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장남 이강석의 권총에 의해 죽고,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다. 12년 간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경찰이 1960년 4월 당시 김 열사의 시신을 갖고 남원으로 찾아가 김 열사의 모친 권 씨에게 시신 인수증을 내밀자 권 씨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나는 시체를 못 받겠으니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기붕한테 갖다 주시오!”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