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금융그룹의 경영을 감시하기 위해 선임된 사외이사들이 찬성표만 던지는 ‘거수기’ 역할에 그치고 있지만 높은 연봉은 물론 유관기관에는 대규모 기부금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지주들은 기부금 지원이 이해 상충에 해당하지 않다고 설명하지만 거액의 지원 속에서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금융지주들의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사외이사 역할의 재정립과 지배구조 개선 등을 통해 주주와 고객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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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이데일리가 5대 금융지주의 지배구조·보수체계 연차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2020~2021년 사외이사에 대한 기부금 지원 규모는 총 117억3000만원으로 집계됐다.
기부금을 받은 사외이사는 총 8명으로 1인당 평균 15억원 정도다. 이들이 소속된 대학교(서울대·연세대·홍익대), 의료기관(연세의료원), 학회(한국세무학회·한국재무학회·한국회계학회 등)에 지주 또는 자회사들이 기부금을 집행했다.
2년간 사외이사 소속에 기부금을 가장 많이 지출한 곳은 우리금융이다. 박상용 우리금융 사외이사가 감사로 있는 연세대·연세의료원에 63억6000만원을 기부했다. 신한금융은 윤재원·이용국 사외이사가 각각 교수로 근무하는 홍익대와 서울대에 총 36억원을 기부했다. 다만 이는 주거래은행 협약에 따른 출연금 지급의 영업목적 기부금이라고 신한금융과 우리금융은 부연했다.
농협금융은 하경자 사외이사의 자녀가 전임의로 일하는 연세의료원에 13억원을 기부했다. KB금융은 선우석호·오규택 사외이사가 소속된 학회들에 4억원대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농협금융 측은 1966년 농협공제 전국 순회 진료 최초 실시한 이래 의료취약계층 및 의료시설이 부족한 농촌지역 의료지원사업 협약에 따른 내용이라고 밝혔다.
금융지주들은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비영리법인 등에 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사외이사와 배우자의 직계혈족이 수탁자·임직원 등인 곳은 사외이사 선임 전 2년과 이후 2년간 기부금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지주의 경영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선임된 사외이사들의 독립성 확보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자신이 소속된 기관·단체에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의 기부금을 제공하고 있는 금융지주에 날 선 의견을 세울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일부 사외이사 자리의 경우 재무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특정 분야에서 인물을 발굴, 선임하는 만큼 이들이 소속한 단체도 비슷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결국 사외이사를 새로 선임해도 ‘자리 물려주기’가 되고 기부금 지원 등도 ‘연례 행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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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에 책정하는 연봉은 갈수록 높아지는 반면 경영진 견제 등의 역할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5대 금융지주 연차보고서에 공시된 사외이사 44명의 지난해 평균 보수는 6948만원이다. 금융지주별로는 KB금융이 8814만원, 신한금융 7854만원, 하나금융 7484만원, 우리금융 6370만원, 농협금융 4530만원 등 순이다.
활동한 시간에 비해 높은 연봉을 받지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는지에 대해선 의문 부호가 매겨진다. 금융지주는 연차보고서를 통해 사외이사의 역할을 ‘경영진 견제’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회의에서 소신 있게 반대 의견을 내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5대 금융지주가 지난해 개최한 이사회에서 나온 반대표는 4건에 그쳤다. 변양호 전 사외이사는 지난해 2021년 결산, 장기보수 취소 결정, 자사주 취득·소각 등 3개 안건을 반대했다. 윤인섭 우리금융 사외이사는 벤처캐피털 인수의향서 제출에 반대한 바 있다. 나머지 안건은 모두 100% 찬성으로 가결됐다.
사외이사들의 ‘셀프 평가’도 도마에 올랐다. 5대 금융지주는 해마다 사외이사에 대한 평가를 실시하는데 본인을 제외한 사외이사 등 내부 평가를 통해 대부분 ‘최고 수준’이나 ‘기대 이상’ 또는 ‘S급’의 점수를 받았다. 외부 평가를 실시한 경우는 한 곳도 없었다. 공신력 있는 외부 평가기관이 없고, 외부 평가에 대한 요청이 없었다는 게 이유다.
금융지주와 전·현직 사외이사들은 ‘거수기’라는 지적에 반박한다. 내부 치열한 의견 교환을 통해 도출한 안건에 찬성하고 대표이사·사외이사·임원 추천도 사측 의견이 배제된 상태에서 엄정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전직 대형 금융지주 사외이사는 “사외이사 역할에는 전문성과 독립성이 중요한데 회사 경영을 위해 독립성보다는 전문성 있는 인물로 채우다 보니 이해 상충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라며 “추천위 과정에서도 알게 모르게 회사의 의향이 반영될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사외이사 제도 개선에 대해 “이사회의 전반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투명하고 세부적으로 공시해 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의 신뢰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