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퇴직연금 경쟁력 순위에서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두 나라가 있다. 영미형 퇴직연금의 호주와 유럽형 퇴직연금의 네델란드다. DC형 중심의 성장경로를 밟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호주 사례가 중요하다. 연금개혁의 방식으로 3층 구조개혁(기초연금·국민연금·퇴직연금)의 필요성에 제기되는 상황에서 호주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호주 퇴직연금은 아태지역 최고 연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우리와 비슷한 보험료(9%)를 내면서 10년 평균 수익률 8%, 소득대체율 31%의 기록적
성과로 호응하고 있다. 10년 수익률 2%, 소득대체율 15%의 초라한 우리 퇴직연금과 비교된다. 수익률만 높은 것이 아니다. 2025년까지 보험료를 12%까지 0.5%씩 점진 인상하는 연금개혁에도 성공했다. 보험료를 전부 기업주가 부담하는 호주식 연금제도의 특성을 생각하면 갈등 보다 합의에 익숙한 노사분위기도 감지된다.
호주 퇴직연금의 높은 수익률과 효율적인 운용체계는 성공 스토리의 한 면일 뿐이다. 다른 한 면은 연금제도의 안정성과 변화가능성을 담보하는 노사 신뢰다. 원래 퇴직연금제도는 기업복지와 금융시장의 교집합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운용제도와 기금제도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합리적인 노사관계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1992년 퇴직연금(Superannuation Guarantee;SG) 도입 과정은 노사의 신뢰와 협력이 축적되는 과정으로, 단계적인 노정타협이 특징이다. 호주의 1970년대는 국가연금제도의 방향성을 둘러싸고, 오일쇼크와 생산성위기를 거치며 보수당 정부와 노동당 정부가 퇴직연금을 국가연금제도로서 합의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토대로 1983년 임금상승률을 물가상승률 내로 제한하는 노정타협이 이뤄졌다. 이 합의를 퇴직연금기금에 처음으로 적용하는 실험도 이어졌다.
보다 논쟁적인 의제는 기업주가 연금보험료를 부담하는 보수체계를 재구성하는 의제였다. 최종적으로 보수 6% 상승분 중 3% 보험료, 2% 임금인상, 1% 소득공제 방식으로 노정간 합의는 이뤄졌으나, 기업주가 국가연금제도의 위법성을 소송하면서 노사정 합의는 대법원까지 가서야 일단락 됐다. 세계은행이 가장 모범적인 연금개혁 사례로 극찬한 호주의 퇴직연금제도는 약 20년의 사회적 대화와 노사의 신뢰 축적 위에 탄생한 것이다. 최근 기업주가 전액 부담하는 보험료를 12%까지 올리는 연금개혁을 큰 무리 없이 이뤄낸 것도 이 같은 노사의 신뢰와 합의의 관행이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는 노사의 신뢰가 약한 상태에서 도입됐다. 기존 퇴직금제도를 이름만 바꿔 퇴직연금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노사가 축적한 신뢰자본이 약하다. 그렇다 보니 근로자의 노후소득관점에서 연금자산을 운용하는 호주식 기금형 제도를 도입하지 못하고 연금사업자의 이해가 반영되기 쉬운 계약형 제도에 머물러 있다.
호주 퇴직연금의 경쟁력은 제도 도입 이후 운용제도 혁신을 통해 강화된다. 도입 이후 지난 30년간 평균 수익률 7%는 수탁자책임강화, 기금선택제, 디폴트옵션제도 등 여러 제도개선을 통해 글로벌 자산배분 역량을 강화한 운용체계의 경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근로자가 소속 회사와 상관없이 원하는 기금을 자유로이 선택하도록 한 2005년 기금 선택제는 성공의 일등 공신이다. 이때부터 기금간 격렬한 수익률 경쟁과 서비스 경쟁이 가능해졌으며 이로 인해 기금간 인수합병(M&A)이 활성화하는 등 퇴직연금시장의 성장모멘텀도 함께 변화하고 있다.
현재 호주 퇴직연금의 ‘빅2’인 AuastrianSuper나 Auastrian Retirement Trust 모두 높은 수익률과 자산성장의 원동력이 지속적인 인수합병이란 사실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물론 활발한 인수합병은 퇴직연금이 계약형이 아닌 기금형 제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