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K출판…`한강 특수` 출판 살릴 마지막 기회[K출판 골든타임]

[K출판 골든타임]①출판업계 "대책 절실" 호소
독서인구 주는데 재룟값 상승에 인력난
출판사 71개사 영업익 1년새 42% 뚝
도서제작비 세액공제 등 지원 시급
공공대출보상제로 저작권료 보장 필요
  • 등록 2024-12-26 오전 6:51:48

    수정 2024-12-26 오전 6:58:47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책 없이 K콘텐츠도 없다더니 구호에 불과했던 거죠. 이 정도면 책 읽지 말라는 정부 아닙니까?”(A출판사 관계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책 품귀’라는 전례 없는 진풍경을 만들어냈지만, 출판·서점가의 현실은 암울하다. 유튜브, 동영상온라인서비스(OTT) 등 디지털 콘텐츠 증가로 독서인구는 계속 줄어드는 데다, 재료값(종이값·인건비 등) 상승과 인력난으로 고사 직전에 내몰렸다.

도서 제작비 세액공제, 공공대출보상 제도 등 실질적인 정부 지원을 통해 출판산업의 허약체질을 서둘러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책에 대한 관심이 커진 지금이야말로 출판업계를 되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보고 있다.
그래픽=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책 안 읽는 대한민국…내년도 출판 예산 460억원

25일 이데일리 취재를 종합하면, 내년도 출판 산업 지원 관련 정부 예산은 460억 원이다. 올해(429억원)보다 31억 원 가량 늘었지만, 2023년 예산(473억원)조차 회복하지 못했다. 출판 산업 지원 관련 예산은 줄었다가, 다시 원상 복구하는 식으로 되돌이표다. 내년 정부 전체 예산에서 문체부가 차지하는 예산 비중은 올해 1.06%에서 내년도 1.05%로 오히려 더 축소됐다.

대한민국 성인 독서율은 10년새 반토막 났다. 문체부의 ‘국민 독서실태조사’(2022년 9월∼2023년 8월 기준)를 보면 연간 종합독서율(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 비율)은 43.0%에 그쳤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약 6명(57%)은 1년 동안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의미다. 종이책을 읽은 성인은 10명 중 3명(32.3%)에 불과했다. 직전 조사(47.5%)와 비교하면 4.5%포인트 하락했다. 독서실태조사를 처음 실시한 1994년 86.8%였던 성인 종합독서율은 2013년부터는 줄곧 내리막이다. 출판유통통합전산망 통계에 따르면 국내 출간된 책의 90%는 2년 넘도록 초판 2000부를 소화하지 못 한다. 대한민국 출판계의 현실이다.

그래픽=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상위 매출 71개 출판사 영업익 약 42.4% 감소

인건비·물류비·자재비 상승 등으로 종이책 생산 원가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한국재정학회에 의뢰해 지난 10월 발표한 ‘출판콘텐츠 제작비용 세액공제 방안 연구’에 따르면 2021년 출판산업 전체 지출 중 종이값과 잉크 등 직접 제작비와 인건비 비중은 각각 29.5%와 27.4%에 달했다. 한 해 전과 비교하면 각각 2.5%포인트, 4.2%포인트 늘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2023년 출판시장 통계’를 보면 국내 주요 71개 출판사의 지난해 영업이익 총액은 약 1136억원으로, 2022년(약 1973억원) 대비 42.4%(약 837억원) 급감했다. 염종선 창비 대표는 “상당수 출판사들이 가내수공업 수준이다. 규모의 경제를 통한 생산비 절감은 출판업계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면서 “1인 출판사의 경우 내일 문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열악하다”고 말했다.

출판업계 주요 인력들의 이탈도 심각한 수준이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수 년 간 투자해 인재를 키워놓으면 결국 처우가 좋은 다른 산업군으로 이직한다”며 “인재 유출이 반복되다 보니 신입 직원을 뽑아서 키우는 것도 꺼려진다”고 답답해했다.

독점 취약 출판 유통 구조 문제

독점에 취약한 불공정한 출판 유통 구조도 문제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빅3 서점’이 10월10일 노벨문학상 발표 후 단 엿새 만에 한강 작가의 책을 100만 부(전자책 포함) 이상 판매하는 동안 지역 서점과 동네 책방은 책이 없어 팔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도·소매를 겸하는 교보문고가 한강의 책을 독점하면서 지역 중소 서점이 소외된 것이다.

2017년 도매업계 2위였던 송인서적이 도산하면서 서점계의 요구에 따라 교보문고는 2020년 본격적으로 도서 도매업에 나섰고, 현재 웅진북센과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서점 공급 수수료는 5% 수준으로, 상생 협약에 따라 다른 업계 7~8%보다 저렴하다. 교보문고와 거래하는 지역서점은 2020년 716개에서 2022년 1100개로 증가했고 현재는 2000~2500곳이 넘는다.

김성신 평론가는 “한강 특수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독과점처럼 출판 유통이 다각화하지 못한 환경 탓”이라며 “완충지대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그래픽=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정부 차원의 실질적 대책 필요

출판업계는 근본적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독서가 멋있다’는 뜻의 신조어인 ‘텍스트힙’(text-hip) 문화가 젊은 층 사이에서 확대하고 있고, 한강 책에 대한 관심이 독서 진흥으로 이어지려면, 지속가능한 정부의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도서 제작비 세액공제와 공공대출보상 제도 시행은 출판업계 숙원이다. 도서 제작비에도 세액공제를 적용해달라는 것이다. 영화, 드라마, OTT 영상물 제작비는 이미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만큼, 원천 콘텐츠 격인 책으로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출판업계의 주장이다.

여야 의원들이 관련 법 개정안을 복수로 발의했고 국회 조세소위에 상정돼 논의 중이지만, 기획재정부가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이번 국회에서 통과가 불확실하다. 음악의 공연사용료·공연보상금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도서 대출 시 작가와 출판사에 저작권료 지급하는 공공대출보상 제도도 논의돼야 할 시점이다.

이광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출판환경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그만큼 좋은 작가가 탄생할 기회도 사라지고 있다. 좋은 책은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면서 “문화콘텐츠산업의 원천 지식재산권(IP)인 출판산업의 생산력을 추인하고 뒷받침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신 출판 평론가는 “책은 일반 공산품이 아니다. 사회적 공공재인 만큼, 종의 다양성이 유지되도록 생태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독서진흥 사업이 기획되고 실행돼 왔지만 예산 배정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진행돼 본래 취지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출판계 새로운 마중물이 되려면 출판업계의 지혜와 무엇보다 정부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좋은 정책은 현장의 신뢰와 일관성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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