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에 따르면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맡긴 보증금이 400조~500조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상당분의 보증금이 세입자의 자기돈이 아니라 은행돈이다. 과거에는 전세보증금은 순자산이었다. 그래서 내 집마련을 위한 밑천으로 중산층으로 올라가는 환승역이자 징금다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대출(빚)이 잔뜩 들어있는 빈껍데기 자산이다. 월급을 모아 전세보증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은행에 손을 내민 결과다. 그래서 전체 세입자가 갚아야 할 전세자금 대출금도 지난 6월말 60조원을 넘었다. 내년에 금리까지 오른다면 부담이 더 늘어 가계 부실이나 소비 침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최근 몇 년 간 하우스 푸어가 우리 부동산시장의 불안요인이었다. 매매가격 급락에 따른 집 가진 사람들의 불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렌드 푸어, 전세 푸어가 더 큰 문제다. 하우스 푸어와는 달리 전세가격 급등에 따른 집 없는 세입자들의 불행이다. 문제는 앞으로 전셋값이 더 오를 경우 세입자들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전세는 세입자들이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공간을 무료로 쓰는 개념이다. 공간을 쓰는 대가로 세입자는 이자를 받지 않는 채권자나 대부업자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전세로 사는 것을 안전자산 구매 행위나 최고의 재테크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집주인 역시 빚을 보관하고 있는 채무자로서의 책무를 잘 지켜야 한다. 3~5년 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되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버블논란이 일고 있는 전세가격이 앞으로 언제까지 올라갈 것인가. 사람들은 현재 상황이 미래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모멘텀 편향이나, 지속 편향이다. 전세가 장기적으로 소멸과정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중단기적으로 굴곡이 있을 수 있다. 전세시장은 본질적으로 사금융의 성격을 갖고 있어 작은 수급의 변화만으로 요동을 치는 특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집주인들은 보증금으로 투자하기보다는 안전하게 보관하는 의무를 잘 지켜야 한다.
박원갑/국민은행 부동산전문위원(부동산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