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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가 최근 박 전 총재를 찾았다.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박 전 총재는 인터뷰에서 “경제 사회 전반에 심화된 계층간 양극화의 골을 메우지 않으면 한국경제에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한국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의 파고를 겪었던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며 “증세를 통한 복지확대를 통해 경제의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 전총재과의 인터뷰는 평창동 자택에서 1시간 30분가량 진행됐다.
“증세 없는 복지 없다...재정건전성 훼손되면 제2의 일본”
“증세없이 복지를 펼치게 되면 결국 국가부채가 늘어나면서 재정적자가 확대됩니다. 이는 일본식 장기불황의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박 전 총재는 우선 증세없는 복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야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의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한국경제가 일본경제와)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재정건전성이다. 저금리, 저환율, 부동산 장기침체, 저투자, 저소비 등 모든 것이 유사하다”며 “재정건전성 만큼은 훼손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박 전총재는 2014년이 한국경제의 고비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가 다소 회복세를 보이긴 하겠지만 저성장 기조는 지속되면서 더욱 심한 양극화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에서다. 경제의 양극화는 결국 복지수요를 자극하고 그 결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출을 요구하게 된다.
박 전총재는 이 같은 맥락에서 한국경제가 ‘빈곤화의 성장’에 허덕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의 파이가 커져도 국민 전체적으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우리 경제가 4% 성장하면 법인기업 소득은 16%늘어나는 반면, 가계 소득은 2% 증가하는데 그칩니다. 대기업이 저축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가계는 1000조원의 부채에 시달리고 있어 중산층은 줄어들고 빈곤층이 늘어나고 있지요.” 그는 “가계저축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인 2%에 불과하다”며 “가계 소득은 낮고 빚은 많은데 저축이 적다보니 소비가 부진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박 전 총재는 그러나 한국의 소득재분배 정책은 지극히 미약하다고 질타했다. “지난 5년간 국내총생산(GDP)에서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OECD 국가 평균(22%)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0%에 불과합니다. 조세부담률과 공적부담률도 OECD 평균인 26%, 45%보다 낮은 20%, 26%에 그치고 있지요. 1인당 소득은 선진국을 지향하고 있는데, 복지수준과 소득재분배 정책은 후진국 수준입니다.”
“대기업 사내유보금 충분...법인세 인상 필요”
전통 경제학에서 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상은 민간부문의 지출을 억제하는 구축효과(crowding effect) 등으로 이어져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박 전총재도 이 같은 우려를 인식한다. 다만 이 같은 논리는 경제에 자본이 부족할때 성립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과거 산업화 시대엔 복지를 늘리면 기업들이 투자할 돈이 부족해 성장이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기업의 유보자본이 많지요. 법인세율을 올리더라도 국내투자가 줄어들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는 “낮은 법인세율을 유지하는 건 대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지만 지금은 법인세율을 낮춰도 대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며 법인세 인상의 필요성을 강변했다. 실제 10대 대기업의 사내 유보액은 2008년 235조에서 2012년 405조원으로 4년간 72% 늘었고, 자기자본에 대한 유보비율은 900%에서 1400%로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국내 투자를 기피하고, 현금유보나 부채상환, 해외투자에 나서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기업의 투자가 일자리 창출과가계소득 증대로 이어졌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들여 공공투자나 복지지출로 전용해야 가계소득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그래야 성장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박 전 총재는 그러나 법인세 인상 논의가 대기업을 옥죄는 차원의 규제로 비화될 가능성에 대해선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민주당 등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대기업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문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기업의 이익을 5000만 국민이 고루 누릴 수 있도록 우리 경제의 막힌 곳을 뚫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합리적인 방식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적절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
“강력한 개혁의지...민주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
박 전 총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규제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게 아니냐며 우회적으로 질타했다.
“정부는 (야당처럼) 경제민주화를 대기업의 독식과 공정경쟁을 위한 규제 측면에서만 접근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기본적으로는 대기업이 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다만 이득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법인세 부과나 각종 사회 기여 등의 정책수단을 통해 부를 환원토록 유도해야지요.”
그간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선 수십년 동안 되풀이됐던 미봉책이라고 꼬집었다. “국민 대다수가 부동산 가격상승을 통해 재산을 형성해 왔습니다. 이는 현 세대가 장차 집을 사야 할 후손들의 소득을 앞당겨 쓴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집값이 너무 올라 지금은 젊은 세대들이 집을 살 수 없는 형편에 직면했고 그 결과 극심한 침체가 온 것입니다.” 그는 결국 부동산 침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거래의 물꼬를 터야 하는 선에 머물러야 할 뿐 강도높은 부양책은 부작용을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집값은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후손들이 소득을 계속 불려 집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당장 건설업이 어렵고 경제성장이 안된다고 해서 부동산 경기를 부양한다는 것은 금연중인 사람에게 다시 담배를 권하는 꼴이지요.”
박 전 총재는 최근 철도노조 파업으로 촉발된 공기업 개혁 등 현 정부의 정책과제에 대해선 끊임없는 개혁의지를 주문했다.
“양극화 문제, 노사문제, 가계부채 문제, 정부부채 문제, 공기업 개혁 문제 등 정부의 과제가 막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기간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강력한 개혁의지를 토대로 확고한 원칙에 따라 민주적인 방법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대담 = 송길호 정경부장, 정리 = 방성훈 기자, 사진 = 김정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