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초 겪은 '왕의 책' 의궤, '디지털 책' 넘기며 살펴볼까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전용 전시실 첫 개관
왕이 보던 '어람용 의궤'·한글로 재구성한 '디지털 책' 등 전시
왕실 주요행사 의례 기록 담은 '조선기록문화의 꽃' 의궤
무단 반출 후 145년 만에 돌아온 아픔의 역사도 조명
  • 등록 2024-11-19 오전 5:00:00

    수정 2024-11-19 오전 5:00:00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사진=방인권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에 마련한 ‘디지털 책’(사진=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김현식 기자] 왕이 보던 책인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장소인 외규장각이 디지털 서고를 갖춘 현대적인 전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자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으로 통하던 외규장각 의궤를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며 한결 편리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판 왕의 서고’처럼 꾸민 외규장각 의궤 전용 전시실은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관에 문을 열었다. 외규장각 의궤를 위한 전용 전시실이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깊다.

전시실은 △‘책이 입는 옷, 책의’ △‘왕실의 위엄, 만세의 모범’ △‘조선 왕실 의례’ △‘디지털 서고’ 등 총 4부로 구성했다. 전시 부제로는 ‘왕의 서고, 어진 세상을 꿈꾸다’를 내걸었다. 실제 외규장각과 비슷한 약 59평(195㎡) 규모의 공간을 전통 건축 형식을 적용해 격조 있게 꾸몄다는 점이 돋보인다.

◇‘디지털 책’으로 재탄생한 외규장각 의궤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을 지닌 의궤는 조선 시대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에 관한 의례 기록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의례의 절차와 내용뿐만 아니라 소요 경비, 참가 인원, 물품을 만든 공장, 포상 내역 등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했다. 필요에 따라 물품의 도설, 행사 반차도 등 그림을 함께 그려 넣어 이해를 돕고자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왕이 보던 어람용 의궤다. 어람용 의궤는 행사에 관여하는 관원들이 볼 수 있게 만든 일반 분상용 의궤와 달리 고급 종이와 안료를 사용해 내용을 채우고 비단으로 장정해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선 시대 당대 최고의 도서 제작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느낄 수 있는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실에서는 어람용 의궤 실물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서고에 있는 ‘디지털 책’을 통해 의궤를 직접 넘겨보는 특별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실제 의궤와 같은 크기(가로 35cm, 세로 50cm)로 제작한 ‘디지털 책’은 일부 페이지를 종이 질감으로 만들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프로젝터를 통해 송출되는 내용이 달라지도록 구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에 마련한 ‘도설 아카이브’(사진=방인권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사진=방인권 기자)
의궤는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인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에 디지털 책은 의궤 내용을 한글과 영문으로 제공해 접근성을 높였다. 더불어 다양한 그림과 영상 콘텐츠를 넣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실에서 체험해 볼 수 있는 ‘디지털 책’은 ‘효종이 읽어주는 발인반차도’, ‘어람용과 분상용 의궤 비교’, ‘한 권으로 읽는 의궤’ 등 총 3종이다.

전시실 조성을 담당한 김진실 학예연구사는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하는 것을 전시 방향으로 잡았다”면서 “향후 콘텐츠 종류를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서고에서는 가로 4.8m의 대형 터치식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만든 ‘도설 아카이브’도 접할 수 있다. 별자리를 테마로 한 ‘도설 아카이브’는 의궤에 담긴 도설 그림 3800개와 관련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각 도설을 터치하면 해당 물품의 쓰임새 등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그림을 확대해서 감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왕의 서고 둘러보며 배우는 아픔의 역사

외규장각 의궤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무단 반출된 아픈 역사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고(故) 박병선 박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노력 끝에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 만인 201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온 이후 13년 동안 두 차례의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7권의 학술 총서를 발간했다. 의궤 전시는 1층 조선실 한편에서 이어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사진=방인권 기자)
처음으로 조성한 외규장각 의궤 전용 전시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후원 모임인 (사)국립중앙박물관회와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YFM)의 지원으로 조성했다. 그간 축적한 전시 경험과 연구 성과를 반영한 다채로운 콘텐츠를 선보이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전시실 도입부는 고화질 이미지로 출력한 의궤 표지 액자들을 모아둔 기억의 공간처럼 꾸며 고국을 떠났다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의 고초를 체감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규장각 의궤 297책(어람용 291책)을 보관하고 있다. 전시실은 1년에 32책(한 번에 8책씩, 1년에 4번 교체)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지난 15일부터 진행 중인 첫 전시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종묘의 신주를 새로 만들고 고친 일을 기록한 ‘종묘수리도감의궤’와 제작 당시의 책 표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어람용 의궤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를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의 결혼과 장례에 관한 의궤로 조선 19대 왕 숙종이 치른 세 번의 가례를 기록한 의궤 3책과 숙종의 승하부터 삼년상을 치르는 절차를 기록한 의궤 3책도 만날 수 있다.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의궤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양상을 반영한 기록물”이라며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외규장각 의궤의 참모습을 알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알차게 꾸몄다”고 강조했다. YFM 위원장인 컴투스 송병준 의장은 “의궤 전용 전시실도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할 수 있는 전시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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