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이렇다 할 교역도 없는 나라에서 담보도 턱없이 부족한 회사가 공사를 하겠다고 하니 지급보증에 나설 은행이 없었다. 최종환 삼환 대표는 1972년 11월 얀부~움라지 도로공사 입찰에서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가 본계약 때 현지업체에 밀려난 악몽을 떠올렸다.
최 대표는 홍승희 외환은행장을 찾아가 건설업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자신을 한번 믿어 달라고 간청했다. 홍 행장의 마음을 움직인 그에게 붙은 별명이 ‘인간 담보물’이었다.
그해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의 여파로 원자재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적자가 예상됐다. 하지만 삼환은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 사우디에 신뢰감을 주었다. 이듬해 사우디의 제2의 도시이자 항구인 제다시(市) 현대화 사업에 참여했을 때 사우디 당국은 메카 성지순례 기간에 맞춰 공항로 확장 공사를 조기 완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 대표는 하루 3교대 철야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전기 시설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자 수천 개의 횃불을 밝혀 놓은 채 공사를 강행했다. 한국인의 근면함과 성실함에 탄복한 파이살 국왕은 다음 공사도 계속 맡기라고 지시했다. 삼환은 6500만 달러 규모의 제다시 2차 현대화 사업을 수의계약으로 따냈다.
그 뒤로도 삼환은 사우디의 펜타곤으로 불리는 방위사령부를 비롯해 당시 사우디 최고층(27층) 건물인 국립상업은행 본점, 왕궁 및 왕자궁 등을 잇따라 건설했다. 예맨, 요르단 등으로도 시장을 넓혔다.
중동 붐으로 해외건설 수주액은 1976년 25억 달러, 1978년 81억 달러로 급증했다. 1981년에는 33개국에서 136억 달러를 벌어들여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해외건설 강국으로 떠올랐다. 1983년엔 동아건설이 36억 달러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수주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중동 사막에 불어닥친 건설 한류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80년 전후로는 한 해 10만 명 넘는 건설노동자가 중동으로 파견돼 사회 곳곳에 새로운 풍속도를 낳았다. 중동 건설노동자 가족의 애환을 담은 소설·영화·대중가요가 등장하는가 하면 TV드라마 ‘왕룽일가’에서는 외로운 부인들을 춤으로 꾀어 돈을 뜯어내려는 제비족 쿠웨이트 박(최주봉 분)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중동과의 인적·문화적 교류도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아라비아 등 서역인으로 추정)들이 600여 년 만에 한국 거리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1975년 5월 2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는 국내 최초의 회교 사원(모스크)인 이슬람중앙성원이 세워졌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중동 국가들이 건설비를 지원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안식처이자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으며 이슬람 문화를 국내에 소개하는 창구이기도 하다.
삼환이 불을 댕긴 중동 진출 붐이 50년 만에 다시 타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스마트 도시 네옴시티를 추진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해 11월 방한해 한국 기업들과 300억 달러(약 40조 원) 규모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1월 UAE를 방문해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으로부터 300억 달러 투자를 약속받았다.
국내 건설업계는 고질적인 하도급 관행과 입찰 비리 등으로 오명을 썼다. 성실함과 기술력으로 해외에서 인정받은 K건설의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삼환기업이 사우디에 진출한 지 6일로 50년이 된다. 모처럼 다시 불고 있는 중동 건설 붐을 계기로 한국 경제가 반등하기를 기대한다.
◇글=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전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