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가은 기자] 비둘기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지만 귀여움을 받는 존재는 아니다. 평화의 상징에서 ‘길거리의 부랑자’쯤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1999년 움직이는 모든 존재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당시 모이를 먹기 위해 잔뜩 몰려있던 비둘기 떼 틈에 앉아있다 맨손으로 그들 중 하나를 손으로 잡아버렸다. 동시에 고막 안으로 “안돼 지지야!”라는 어머니의 고함이 꽂혀들어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는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한강에서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할 때나 홀로 공원 벤치에 앉아있을 떄 주변 비둘기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 싶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둘기 쫓기 자세’를 취한다. 도시의 비둘기들이 어떤 먹이를 먹고 웬만하면 날지 않는 조류가 됐는지 깨달아버려서다.
|
문제는 어느 순간 기억을 잃고 ‘완전한 비둘기’가 돼버린다는 점. 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자신의 신체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다소 암울한 상황이지만 비둘기를 사랑하는 허새보 작가 특유의 유머코드와 자연에 대한 묘사가 더해져 독자들에게는 일종의 ‘힐링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작가의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와 이를 반영한 요소들이 철학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과연 헌서는 ‘비둘기 인간’으로 여생을 살게 될까?
△비둘기라는 동물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소재로 삼기에는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평소에 비둘기를 좋아하시나요.
원래는 오리를 한 4년 정도 좋아했는데요. 성북천에 흰 오리가 있잖아요. 그 오리가 항상 혼자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철새들이 눌러앉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이 많아진 거예요. 원래 걔가 외로워 보여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더 이상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주변을 봤더니 비둘기들이 많은데 점프하는 모습이 되게 귀여웠어요. 그 모습을 계속 관찰하다보니 주인공으로 비둘기가 나왔네요. 원래 동물에 무심해요. 강아지랑 고양이는 안 귀엽고 닭은 귀엽다 이 정도 수준이었는데 이렇게 관찰하게 된 건 최근입니다.
△캐릭터 중 ‘반휘혈’이 비둘기를 키우는 SNS를 보는데요. 실제 사례인가요.
국내에서는 자료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는데 해외에는 그런 문화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영어로 검색하면 커뮤니티도 있고 아예 ‘피죤 사이트’가 있어요. 거기서 교류를 하고,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습니다.
△비둘기를 키우실 생각도 있으신가요.
△웹툰의 배경이 성북천인데 평소에도 많이 다니세요?
맞아요. 연재하기 전에 좀 많이 다녔었어요. 각생이랑 콘티 작업을 하던 시기에 제가 재택근무를 했고, 또 몸이 몇 년동안 좋지 않아서 최저 생계비를 벌 정도로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성북천에 앉아있었는데 그 때 경험이 누적된 결과입니다.
△비둘기가 된 헌서가 친구인 반휘혈이나 부모님께 굉장히 빠르게 존재를 알리고 또 인정받는데요. 이야기를 이렇게 짜신 의도가 있으신가요
이 흐름으로 진행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제가 고구마 전개를 싫어하고 오해를 싫어해요. 또 인물과 상황에 빠르게 몰입하는 편이라 만약 내가 이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고 그렸어요. 독자 분들께서는 예상치 못하게 힐링이 된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처음에 생각한 반응은 아니라 신기했어요.
△만약에 작가님께서 비둘기가 되면 헌서처럼 친구나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잠깐만요. 생각하니까 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헌서가 했던 대로 할 것 같아요. 근데 사람들의 반응이 좀 다를 수 있겠죠. 극 중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실제로는 다를 수 있죠.
△헌서가 자꾸 인간의 정신을 잃고, 완전히 비둘기가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비둘기의 본능이 튀어나오는 요소는 의도한 게 맞습니다. 고민은 제가 비둘기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아서 ‘귀소 본능’이라는 강력한 본능을 이미 써버렸고, 더 활용할 요소를 찾고 있어요. 사람들이 비둘기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다보니 국내에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외국 논문도 찾아보고 있는데 방역과 면역체계 같은 내용만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 지식이 증가되지 못하고 있어요.
△헌서가 안 그래도 비둘기의 삶에 적응을 많이 하는데 나중에는 이야기가 좀 더 확장되는 건가요.
△작품 내용 중에 무당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얘기를 하는데요. 헌서는 어떻게 되나요.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있어요. 엄청 나중에 돌아올 수도 있고...근데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과 흐름을 선택하다보면 정해질 것 같아요.
△평소에 영감은 어디서 받으세요.
저는 만화 작품도 보지만 다른 매체의 영향을 되게 많이 받아요. 안국에서 본 서도호 작가의 설치 미술 전시가 있었는데 재밌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더라고요. 또 탄소를 적게 배출하면서 해외와 국내를 빨리 오가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실천하려고 바다를 오가는 다리를 기획하시고, 공대에 문의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도 안되는 걸 진지하게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어서 작품 중 유머코드에 발상을 반영한 부분도 있습니다. 또 제가 소리에 관심이 많아서 리듬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초반에는 작품의 호흡을 많이 신경써서 픽셀마다의 리듬을 초 단위로 고민해 그리기도 했어요.
△계획 중인 신작도 있으실까요.
몇 만년 후의 성북천을 배경으로 하는 아포칼립스 물을 그려보고 싶어요. 성북천에 기괴한 식물과 생물들이 사는 콘셉트인데요. 아직 아이디어 단계긴 하지만 인공지능(AI)도 등장하고, 철학적인 고민도 넣을 생각입니다. 깊이가 깊어진다면 연재하고 싶어요.
△독자 분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독자분들 반응을 보면서 ‘아 내 작품이 이런 감성을 주는구나, 이런 작가로 받아들여지고 있구나’라고 나중에 알게 되는게 재밌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