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금융위원장으로서 가계부채 특급 소방수 역할을 부여받은 고승범(사진) 금융위원장이 오는 8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고 위원장은 지난 3일 코로나 탓에 온라인으로 진행한 기자간담회 말미에 “제가 왜,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일을 해왔는지 말씀 드리려고 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미리 배포한 보도자료에도, 기자들 질문에도 없었던 ‘진짜 속마음’을 스스로 꺼낸 셈이다.
‘뼈속까지 매파’인 그는 8월 31일 취임 후 3개월동안 ‘가계부채와의 전쟁’에 매진했다. 그는 석달 전 취임사에서 “급증한 가계부채가 내포한 위험요인을 제거하는 데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정책역량을 집중하겠다”며 ‘가계부채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등판 여건은 나빴다. 코로나 위기 탓에 지난해 가계부채 증가세는 전년도(4.1%)의 2배 수준인 7.9%까지 급증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올해 가계부채 증가세를 5~6%로 끌어내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등판 시기도 늦은 편이다. 내년 3월 문재인 정부가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긴 여유를 부를 수 없는 ‘마무리 투수’에 가깝다.
그래서 그가 택한, 어쩌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략이 강도 높은 ‘가계부채 총량 관리’다. 쉽게 말해 ‘대출 틀어막기, 돈줄 조이기’다. 고 위원장은 “가계부채 관리강화 과정은 당장은 인기가 없고 쉬운 길이 아님을 잘 알지만, 금융안정을 위해 과단성 있게 추진해야만 했다”며 “일단은 급등추세의 전환을 견인하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소회했다.
부작용도 없진 않았다. 9월 NH농협은행을 시작으로 금융권 이곳저곳에서 ‘대출 중단’과 ‘대출 절벽’ 사태가 속출했다. 밀려드는 수요를 막기 위한 은행별 우대금리 축소와 시장 금리 상승이 합쳐져서 과도하게 대출금리가 급등하는 후폭풍도 몰아쳤다. 은행이 이 과정에서 폭리를 취했으며 그럼에도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그럼에도 시장 평가는 ‘성과가 있었다’는 게 대체적 목소리다. 은행권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강하게 밀어붙인 측면이 있지만, 가계부채 증가세가 꺾이면서 가계부채 안정화와 금융 불균형 해소에서는 평가를 해줘야 할 것 같다”며 “빅테크(대형 정보통신기술)나 핀테크에 대해서도 ‘동일기능, 동일규제’ 원칙으로 무게 중심을 잘 잡아줬다”고 말했다. 반대로 핀테크 업계 일각에서는 고 위원장 취임 이후 금융 혁신이 지체되는 거 아니냐는 시각도 없진 않다.
정부는 내년 가계부채 관리계획을 금융권 협의를 거쳐 이달 중 확정한다. 내년에는 대출 중단이 없도록 분기별 공급계획도 마련할 계획이다. 고 위원장은 “내년도 가계부채 총량 관리 시 중·저신용자 대출과 정책서민금융 상품에 대해 충분한 한도와 인센티브를 부여할 것”이라며 “총량 관리 한도에서 제외하는 방안까지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급한 불’ 가계부채 증가세를 잡은 고 위원장의 시선은 이제 기업부채로 향하고 있다. 그는 “금리 상승기 전환, 코로나 지원조치 정상화 등과 맞물려 유예된 자영업자 부실이 경제의 위험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며 “특히 내년 3월에는 2020년 4월부터 2년간 유지돼 온 전(全) 금융권의 대출 만기연장·이자 상환유예 조치가 종료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정부가 코로나 대출 지원 종료를 3월이라고 공식적으로 못박은 것은 고 위원장 이번 발언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2020년 4월부터 전 금융권이 동참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만기연장 및 이자 상환유예 조치를 시행 중이다. 코로나19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지난 9월말 종료될 예정이었던 지원 조치를 세번째 추가 6개월 연장을 통해 내년 3월까지 미뤘다. 소상공인 등에 대한 대출·보증 만기연장 및 이자상환유예 규모는 355조2000억원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