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 미안하다.”
| 21일 세상을 떠난 김민기 학전 대표. (사진=학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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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73) 학전 대표가 21일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은 그다웠다. 평생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며 살아온 고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변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김민기의 조카인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은 22일 서울 종로구 학림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나 “선생님의 특별한 유언은 없었고, 대신 3~4개월 전부터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며 “남은 가족, 그리고 학전 운영을 이어가야 할 학전 식구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늘 하셨다”고 말했다.
학전에 따르면 지병인 위암 투병 중이던 김민기는 21일 밤 8시 26분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통원 치료 중이던 김민기는 지난 19일 금요일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 다음날 근처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일요일 밤 숨을 거뒀다.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까지도 가족과 함께였다. 김 팀장은 “선생님이 보고 싶은 가족들이 올 때까지 다 기다리셨고, 잘 만나고 떠나셨다”고 전했다.
김민기는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노래 ‘아침이슬’을 작사·작곡한 가수다.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며 고(故) 김광석, 황정민, 김윤석, 조승우 등 수많은 배우와 공연예술인을 배출시키기도 했다.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한국 창작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새겼고,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등으로 어린이 공연 발전에도 기여했다.
|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학림에서 가수 김민기 별세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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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위암 투병 소식은 지난해 11월 학전 폐관 결정 소식과 함께 전해졌다. “김민기가 없으면 학전도 없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학전은 개관 35주년을 맞은 지난 3월 15일 폐관했다. ‘배움의 밭’이라는 뜻의 학전(學田)이 사라진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모인 학전 출신 가수, 배우들이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열며 학전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소극장 학전 공간은 “어린이와 청소년, 신진 음악인을 위한 공간으로 써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새 단장해 지난 17일 재개관했다.
소극장도 사라졌고 김민기도 세상을 떠났지만 학전은 사라지지 않는다. 김 팀장은 “학전은 현재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다”며 “눈에 보이는 자료들은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가지고 가 2~3년 뒤 소장 자료로 확인하게 될 것이고, 학전은 김민기 선생님의 공연과 대중음악 작품 모두를 아우르는 아카이빙을 학전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선생님께서 내려고 한 작품 대본집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지하철 1호선’ 등 학전이 제작한 공연은 앞으로 만날 수 없다. 김 팀장은 “김민기 선생님이 연출하지 않는 학전 작품은 있을 수 없다”며 “다만 여지를 남겨둔다면 ‘지하철 1호선’ 40주년이나 50주년 때 가족들과 함께 한 번쯤 공연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 시점에선 공연을 제작할 계획이 단호하게 없다”고 밝혔다.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민기 학전 대표의 빈소. (사진=학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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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남긴 또 다른 당부는 “나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지 말라”이다. 김 팀장은 “학전 폐관 소식이 전해진 뒤 ‘학전 출신 배우들이 1억씩 기부하면 학전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있었는데, 학전 출신 배우들도 그런 마음이 있지만 김민기 선생님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라며 “학전은 학전 출신 예술인들의 도움을 물심양면으로 정말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학전은 고인과 가족의 뜻에 따라 조의금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고 밝혔다. 김 팀장은 “선생님은 배우 설경구, 장현성 등이 찾아와도 ‘밥은 먹었니?’라고 물어보셨을 분”이라며 “선생님을 모신 분들, 가족들의 의견을 모아 조의금과 조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이 늘 이야기한 따뜻한 한 끼를 같이 나눠 드리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고인의 발인은 오는 24일 오전 8시이며 장지로 떠나기 전 학전 앞마당을 지나갈 예정이다. 고인을 위한 일반인의 추모 공간 또한 소극장 학전 앞마당에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김 팀장은 “공식적으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선생님을 생각하며 학전을 찾아오신 분들이 앞마당에 꽃을 놓고 가셔도 좋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