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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유사시 엔(円)화를 사라.” 이 논리는 언제까지 작용할까. 현재 일본 엔화는 명실상부 국제 금융 시장의 대표 안전 자산이다. 미국의 시리아 폭격과 북한 핵미사일 긴장이 높아지는 현재도 엔화 가치는 금값, 미 국채와 함께 오른다. 그러나 일본에서 ‘엔=안전자산’ 공식이 10년밖에 안 됐으며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허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외환시장을 20년 남짓 취재해 온 일 유력 경제주간지 닛케이 베리타스의 편집장 오구리 타이(小栗太)는 2008년 금융 위기를 촉발한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안전 통화를 달러에서 엔으로 바꿔 놓았다고 분석했다. 10여년 전 2006년 10월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신문을 보면 ‘북한 리스크로 엔 매도’라는 제목으로 북 핵개발과 그에 따른 시장 여파를 소개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정치적 리스크가 높아질 때 선호된 안전 자산은 미국 달러화였다. 그러나 2008년의 리먼 쇼크와 그에 앞선 2000년대 초 9·11테러가 미국 정치·경제 전반을 뒤흔들면서 달러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후카야 고지(深谷幸司) FPG증권 사장은 “투자자는 불확실성이 떠오르는 시기엔 우선 이미 오른 주식을 팔아치운 후 위험이 현실화하면 실제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재차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현 위기상황에 지난해 11월 이후 이어진 ‘트럼프 랠리’에 이미 오른 주식을 팔고 달러 대비 엔화 약세를 고려해 엔화를 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리스크가 실물 경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추가 매수 혹은 매도한다. 2008년 리먼 쇼크 때 투자자가 안전 자산인 달러를 버리고 일본 엔화로 자금을 옮긴 게 대표적 사례다.
일본 경영·금융계로선 달러 대비 엔화 강세가 일본 기업의 수출 수익성을 떨어뜨리고 다시 주식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불온한 국제 정세 탓에 엔화가 강세인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달러가 너무 강하다’며 달러 약세를 부추기고 있어 엔화는 달러당 108엔대까지 떨어졌다. 이에 도쿄증권거래소 주요 지표도 연일 하락하고 있다.
후카야 사장은 동일본 대지진 때처럼 북한과의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다시 ‘유사시 엔 매수’가 아니라 ‘유사시 엔 매도’로 돌아설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 정부의 움직임이 과거 미 정부와 달리 ‘강 대 강’으로 대치하려는 게 명확하기 때문이다. 오구리 편집장은 그러나 “‘북한 리스크로 엔 매도’란 제목이 신문에 등장하려면 북한 정세가 (우리가 원치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까지 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며 그 가능성에 대해선 의문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