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남녀 구분 없이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무용수들이 긴 원통을 들고 춤을 춘다. 원통은 막대 높이뛰기를 위한 장대가 되기도 하고, 장총이 돼 하늘을 향해 총소리를 울리기도 한다. 형형색색의 치마를 덧입고 있던 여성 무용수들은 갑자기 옷을 벗어 무대 밖으로 내던지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 같다. 무대는 어느새 해방감으로 가득하다.
| 국립현대무용단 신작 ‘여자야 여자야’ 연습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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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용계의 ‘파격의 아이콘’인 현대무용가 안은미(60)가 ‘신여성’을 소재로 한 신작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극장이 공동 주최하는 ‘여자야 여자야’다. 오는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신여성’은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을 가리킨다. 안은미는 이를 “격변의 시대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문명의 문을 연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최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내 국립예술단체 공연연습장에서 만난 안은미는 “이름을 남기지 않은 위대한 ‘신여성’을 위한 ‘헌정 댄스’가 될 것”이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안은미는 한국 무용계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무용가다. 1988년 현대무용단 안은미컴퍼니를 창단해 미국, 유럽 등 세계를 무대로 활동 중이다. 2006년 민간 무용단 최초로 유럽 투어 공연을 진행했고, 2011년 에든버러 페스티벌 공식 초청을 받았다. 2018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 시립극장 테아트르 드 라빌의 상주 예술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날 연습 현장을 통해 미리 본 ‘여자야 여자야’ 또한 안은미의 독특한 색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20분가량의 짧은 시연 동안 남녀 각 6명 총 12명의 무용수는 쉼 없이 무대를 뛰고 또 움직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나의 작품은 피지컬을 통한 인간 생명력에 대한 질문”이라는 안은미의 말처럼 강렬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 국립현대무용단 신작 ‘여자야 여자야’ 연습 장면. 안무를 맡은 현대무용가 안은미. (사진=국립현대무용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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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간중간 신여성을 대신하는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등장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안은미는 “신여성이 했던 말, 글을 목소리와 텍스트로 함께 선보일 것”이라며 “당시 신여성이 보여준 제약과 제한 없이 확장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음악은 안은미의 오랜 작업 파트너인 장영규 음악감독이 맡았다.
안은미는 이번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신여성이 보여준 치열함을 우리가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관객에게 질문하고 싶다고 했다.
“신여성에 대해 많이 연구했어요. 그들은 지금보다 더 처절한 상황에서 세상과 싸웠더라고요. 여성이라는 주체로서 사회에 발을 내디딜 때, 남성이 질투와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이분법은 나쁘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 또한 남성을 나쁜 놈으로 묘사하지 않아요. 여성이 무언가를 할 때 남성도 함께해야 한다는 걸 이야기하죠.”
안은미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몸’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다. 무용 비전공자들과 협업해 선보인 ‘댄스 3부작’(‘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사심없는 댄스’,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댄스’)이 대표적이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할머니들의 막춤을 소재로 국내는 물론 유럽 투어까지 진행한 안은미의 대표 레퍼토리다. 이 작품은 세종문화회관 ‘세종썸머페스티벌’ 프로그램으로 오는 11일과 12일까지 광화문광장에서 무료 공연으로 만날 수 있다.
안은미가 ‘신여성’에 이어 관심을 두고 있는 테마는 ‘아이들’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해 추진한 ‘꿈의 무용단’ 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안은미는 “아이들도 생각 이상으로 무용을 재미있어했고, 이들 중 뛰어난 안무자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며 “어린이 무용단을 만드는 것은 앞으로 저의 중요한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국립현대무용단 신작 ‘여자야 여자야’ 연습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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