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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노희준 송승현 기자] 설마 하던 우려가 현실이 되기까지엔 꼭 10시간이 걸렸다.
23일 오전 10시25분 서울중앙지법 앞.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이 변호인들(법무법인 로고스 최정숙·김병성 변호사)과 함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올 때만 해도 입술을 굳게 다문 양 전 원장의 얼굴에서 구속을 예감하는 표정은 엿볼 수 없었다. 영장심사를 맡은 명재권(52·27기) 부장판사가 ‘검찰 출신’이긴 했지만, 까마득한 후배인 데다 이미 2009년부터 판사 생활을 시작한 터였다.
5시간 반 가량 진행된 영장심사를 마치고 오후 4시쯤 법정을 나선 양 전 원장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떤 부분을 소명하셨냐’는 취재진 질문에 곁에 있던 최 변호사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장심사에서 검찰 측이 꺼내 든 ‘히든 카드’에 양 전 원장 측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채 옴짝달싹 못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영장 발부 여부를 둘러싸고 장고(長考)에 들어간 법원이 10시간 만인 24일 새벽 2시 발부 결정을 알린 순간, 양 전 원장 측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이날 현직 수장인 김명수 대법원장은 출근길에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이라며 허리를 두 차례나 굽혔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 말이 없다”고 말을 잇지 못했고, 다른 부장 판사 역시 “‘중간 라인’(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불구속 된 상태에서 ‘헤드’를 구속하는 건 어색하다고 봤는데, 당위성을 떠나 다들 놀라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사법부의 신뢰가 바닥에 추락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지방의 한 판사는 “아직 본 재판이 남아 있긴 하지만 구속을 한 것은 일부 혐의에 대해 소명이 됐다고 판단한 것”이라 “사법부 일원으로서 국민께 송구하고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원 내부 보혁 갈등이 불거지지 않을지 후폭풍을 우려하면서도 사법부가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대법원이 세 차례나 자체 조사를 하고도 ‘형사처벌 할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조사였던 게 밝혀진 셈”이라며 “‘사법농단은 없다, 실체가 없다’는 논쟁은 끝내고 사법 개혁을 어떻게 이뤄나갈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원 내 갈등과 검찰·법원 간 갈등이 심해질 것”이라며 “울산지방법원장·사법연수원장 등과 같이 뜻 있는 고위 법관들도 떠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