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실패 가득한 삶에도 언젠가는 이룰 우리들의 인생 ‘1승’을 응원하는 영화. 추운 겨울, 지칠 일상에 희망과 위로를 선사할 꼴찌들의 대반란. 피, 땀, 눈물의 스토리텔링에 여자 배구 스포츠의 매력까지 야무지게 담았다. 작지만 알찬 유기농 스포츠 영화 ‘1승’(감독 신연식)이다.
‘1승’은 이겨본 적 없는 감독과 이길 생각 없는 구단주, 이기는 법 모르는 선수들까지 승리의 가능성이 1도 없는 프로 여자배구단이 1승을 위해 도전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국내에서 배구를 소재로 다룬 영화는 ‘1승’이 처음이다. 지금은 김연경 등 배구스타들을 배출하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종목이 됐지만, 과거까지 비주류 종목으로 인식됐던 여자 배구란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운 개성으로 주목받았다.
‘1승’은 오합지졸 팀이 우승을 이루는 판타지 스토리는 아니다. 팬들마저 외면하고 칭찬과 기대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꼴찌 여자배구 팀과 꼴찌 감독, 괴짜 구단주가 우승보다 값질 시즌 단 한 번의 ‘1승’을 위해 인생을 걸 피, 땀, 눈물의 노력을 펼치는 고군분투를 그린다.
영화는 배구 이론에는 누구보다 빠삭하지만, 10%도 되지 않는 승률에 패배만 맛본 배구 감독 김우진(송강호 분)이 해체 직전의 꼴찌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직을 제안받으며 포문을 연다. 아무도 관심 없던 핑크스톰을 인수한 주체는 괴짜 재벌 구단주 강정원(박정민 분). 그가 김우진 감독을 영입한 이유도 예사롭지 않다. 경기는 전승전패에 파직, 파산, 파면, 이혼까지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실패 뿐인 김우진의 인생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강정원이 핑크스톰과 김우진에 내건 조건은 딱 하나. 우승도 아닌 ‘1승’이다. ‘1승’만 한다면 핑크스톰 경기 시즌권을 구매한 이들에게 총 상금 20억원을 지급하겠다는 파격 공약까지 내건다.
그렇게 구단을 산 강정원은 패배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무기력해진 핑크스톰과 마찬가지로 실패만 맛본 김우진 감독의 신경을 건드리며 과감히 체제를 바꿔나간다. 김우진은 처음엔 모든 게 쉬운 강정원의 재벌 마인드와 MZ식 사고, 번뜩이는 마케팅 능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사건건 대립한다. 핑크스톰 선수들의 면면도 ‘꼴통’ 그 자체다. 나이 많은 마흔살 주장 방수지(장윤주 분)는 낮엔 뜨개질, 밤에는 클럽에 다니며 스트레스를 풀고 젊은 선수들은 실력으로 줄 세우기, 따돌림 등 뿌리 깊은 갈등의 골로 매일이 싸움박질의 연속이다.
강정원은 한정된 예산 안에서 자신의 재벌 인맥과 마케팅 능력을 동원해 핑크스톰 선수들의 모든 것을 탈바꿈한다. 인성 및 폭력논란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실력은 뛰어난 선수 오보라를 시작으로, 어디서 왔는지 알 순 없지만 실력만큼은 에이스인 재일 교포 용병 유키(이민지 분) 등을 영입한다.
김우진은 그런 강정원의 결정에 처음엔 반발한다. 하지만 수십 년간 쌓아온 해박한 배구 지식과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았고, 선수들 자신마저 몰랐던 재능들을 하나둘 씩 발견한다. 그렇게 20년간 후보만 전전했던 주장 방수지는 물론, 6년간 경기 경험이 끊긴 선수, 선수들 간 따돌림으로 주전에서 늘 제외됐던 선수까지 코트에 세운다. 각자의 재능을 바탕으로 경기 포지션과 연습 방식도 완전히 탈바꿈한다.
영화는 ‘1승’ 자체가 요원해보였던 꼴통 팀 핑크스톰이 분열에서 ‘1승’이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서히 단결해나가는 과정을 섬세히 몰입감있게 그려나간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 개인의 서사와 연습 과정을 손에 땀을 쥐는 배구 경기 장면과 교차해 배치한 연출과 편집이 눈에 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김우진의 서사 역시 뭉클하고 인상적이다. 한때 촉망받는 고등학교 배구 유망주였던 김우진이 스승에게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실패에 익숙한 감독이 된 과정, 실패만 맛봤지만 그럼에도 스포츠인으로서 가슴 한켠에 남은 김우진의 열정과 인정을 향한 갈망이 짠한 공감을 선사한다.
구단주, 선수들과 매일같이 부딪히던 김우진이 같은 꼴찌의 입장에서 핑크스톰 선수들의 다친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진정한 스승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도 뭉클하다. 선수와 자신을 비난하는 팬들에게 “이겨본 적 없는 이 친구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비난이 아닌 칭찬”이라고 호소하는 김우진의 항변은 찡한 감동으로 와닿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꼴찌 팀 핑크스톰의 ‘1승’을 전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실패와 트라우마로 얼룩진 김우진의 인생을 위로하는 ‘1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독특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과 김우진 감독과 등장인물들의 다채로운 케미스트리, 실제 코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현실감넘치는 배구 경기 장면들이다.
‘1승’은 주요 배우인 송강호, 박정민, 장윤주, 박명훈 외에도 이민지 등 핑크스톰 소속 선수로 활약한 조연, 단역 배우 한 명 한 명의 스타일링과 캐릭터성이 살아있다. 이들이 김우진 감독과 투닥거리는 모습은 징글징글하지만 사랑스러운 사제 케미를 유발한다. 국가 대표 배우 송강호가 다른 배우들과 발산해내는 다채로운 관계성도 볼 만하다. 송강호와 구단주 박정민의 케미, 장윤주와의 케미, 카메오로 깜짝 출연한 슈퍼걸즈팀의 감독 조정석과의 재회 케미가 다양한 웃음을 자아낸다. 한동안 정극으로 관객과 시청자들을 만났던 송강호의 생활 코미디 연기도 반갑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등 송강호의 초창기 모습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묵직하고 타격감 있는 공의 사운드, 공의 시점에서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 단체 안무를 짜듯 정교한 선수들의 동선과 움직임은 배구 경기 장면의 몰입감과 배구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여기에 김연경과 한유미, 이숙자, 하경민 등 카메오로 든든한 지원사격을 펼친 배구계 스타들의 깜짝 열연을 관전하는 재미까지 보장한다.
12월 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0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