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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큐멘터리가 특히 인상적인 건 돈에 대한 김장하 선생님의 남다른 생각 때문이다. 열아홉의 나이에 일찍이 한약방을 열고 큰 성공을 거둔 데는 선생님이 주장한 ‘박리다매’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약값을 기술료라고 해서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기술료보다는 수가를 줄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전성시를 이루던 한약방은 손님이 많을 때는 한 달에 수익만 1억원 씩 남을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당시를 술회하는 경남 한약사협회 이용백 회장은 김장하 선생님이 운영하는 남성당 한약방이 자신의 한약방보다 10배 정도 손님이 많았다고 했다. 직원들도 거의 스무 명에 달했고 그들의 봉급도 다른 한약방에 비해 두세 배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많은 돈을 벌고도 평생 자가용 하나를 끌지 않았다. 대신 돈이 급한 이들에게 늘 흔쾌히 돈을 내주셨다. 당시 한약방 옆에 거주했던 이웃은 ‘우리 금고’처럼 돈을 갖다 썼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쓰지 않지만 타인들에게는 아낌없이 쓰는 면면은 그가 설립했던 명신고등학교 재단 운용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영어교사였던 이달희씨는 김장하 선생님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늘 자가용이 아닌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던 모습을 이야기했다. “우리한테 낭비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우린 좀 부끄럽다”는 말을 자주 꺼냈다. 모의고사 친 저녁에 늘 회식을 시켜주셨는데 김장하 선생님은 늘 ‘학부모한테 손 벌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소갈비집에서 회식을 시켜주신 데는 그런 뜻이 있었을 터였다. 자신은 차 한 대 없이 살면서도 선생님이나 학생들에 대한 복지는 아낌이 없었다는 거였다.
김장하 선생님에게 모아진 돈은 사회의 거름으로 쓰였다. 한약방에는 선생님을 찾는 이른바 ‘김장하 장학생’들이 즐비했다. 가난해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부족한 학생들은 한약방을 수시로 찾아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장학금을 현금으로 받아가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이들은 교수부터 재판관, 셰프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의 동량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선생님을 닮고픈 마음이었다.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받은 만큼 환원하고픈 바람이 느껴졌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간 제자에게 김장하 선생님은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장학생 지원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관련 운동은 물론이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활동, 진주신문 지원, 극단 지원, 문고 지원 등등 김장하 선생님은 자신의 모은 돈이 똥이 되지 않기 위해 세상 곳곳에 거름으로 뿌렸다. 그 결과 돌아온 건 세상을 밝히는 많은 인물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한 거였다. 그건 다큐멘터리 말미에 한약방이 문 닫는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제자들을 보며 환하게 웃는 선생님에게 제작진이 “사람농사 대풍”이라고 한 말 그대로였다. 돈의 쓰임새 하나가 어떤 물꼬를 내고 이를 통해 선한 영향력이 선순환되는 것. 그걸 김장하 선생님은 일생을 통해 실천해왔던 거였다.
그런데 도대체 선생님은 왜 그토록 많은 돈을 벌고도 이처럼 다른 쓰임새를 고민했던 걸까. 거기에 대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그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호화방탕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한약사라는 직업이 갖는 의미를 남달리 생각했고, 그래서 세상을 고치는 방식으로 거름이 되는 돈의 쓰임새를 찾았던 거였다. 돈이면 ‘어른’처럼 행세할 수도 있는 것처럼 치부되는 세상에,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 다큐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