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확대경]재정 중독 앞에 장사 없다

  • 등록 2023-05-04 오전 12:01:00

    수정 2023-05-04 오전 12:02:14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긴축하고 있음에도 기대인플레이션이 5%에 가까운 현실은 그야말로 ‘수수께끼’다. 지난달 미시건대 1년 기대인플레이션이 4.6%로 나오자, 월가는 혼돈에 빠졌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미국 연방준비제도 로고. (사진=AFP 제공)


미국의 끈적끈적한 물가를 볼수록 90세 노(老)교수의 한탄이 자꾸 떠오른다. 에드먼드 펠프스 컬럼비아대 명예교수는 넉 달 전인 지난해 말 인터뷰에서 ‘왜 물가가 안 떨어지냐’는 질문에 미국 자본주의 황금기로 불리는 1950~1960년대를 대뜸 거론했다. 당시와 같은 민간의 자생적인 혁신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정부 부채가 너무 증가했어요. 필요에 따라 정부와 의회가 지출을 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재정 확대 가운데 일부가 (국채 발행량의 증가로 인해) 실질금리를 끌어올리고 이것이 기업 투자를 압박해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주기적으로 위기가 찾아오면 정부가 돈을 풀어 해결하고, 이것이 다시 위기를 부르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일침이었다. ‘어쩌다 미국이 이렇게 됐나’ 하는 기운마저 느껴졌다.

미국 예산관리국(OMB)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120.2%를 기록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2분기 때는 134.8%였다. 이 수치가 120%를 꾸준히 넘긴 것은 미국 역사상 2020년 이후밖에 없다. 1960년대 줄곧 30%대였다는 점은 요즘 재정 의존도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회가 잊을 만하면 벌이는 떠들썩한 부채 한도 상향 협상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이 법으로 정한 부채 한도를 넘어서면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진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시장 인사들은 거의 없다. 부채 협상은 기축통화 특권을 등에 업고 합법적으로 무한정 돈을 쓰겠다는 확인 절차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이참에 한도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이번 은행 위기에서 정부가 사실상 모든 은행의 예금을 인수하는 식으로 사태를 봉합하는 것도 이런 시류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재정 중독이 더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냉전에 따른 국방비 지출 △고령화에 따른 복지 지출 △기후 위기에 따른 녹색 투자 등 돈 쓸 일 자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팬데믹 창궐, 은행 줄도산 같은 예기치 못한 국면이 다시 온다면 돈을 또 풀 게 분명하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재정 확대는 미국을 2%대 인플레이션 국가에서 5%대 국가로 만들어 놓았다”고 우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미국이어도 흥청망청 앞에 장사는 없는 법이다. 달러화가 당장 무너지는 최악 시나리오는 없겠지만, 미국발(發) ‘중금리 중물가’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경고는 힘을 받고 있다. 2010년대 ‘저물가 저금리’와는 환경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는 의미다. 하물며 선진국과 신흥국의 경계에 있는 한국은 이를 딴 세상 얘기처럼 여기면 안 된다. 한국이 돈을 막 푼다면 후유증이 더 클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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