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한 고위인사는 최근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대형 인수합병(M&A) 시사 발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7년 전장 자회사 하만을 인수한 이후 7년째 이렇다 할 빅딜이 없었는데 왜 매번 대형 M&A 발언을 하느냐’고 기자가 묻자 이 인사는 “삼성전자 정도의 회사가 언급하는데도 시장은 이제 원론적인 발언으로 치부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한 부회장은 최근 3년 연속으로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에서 M&A 가능성을 거론했으나 재계와 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이 고위인사는 그보다 M&A 정체기가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와 정확하게 겹쳐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 회장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소송전에 휘말렸다. 이 인사는 “오너가 법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면 경영 정상화는 요원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2022년 회장 취임일과 지난해 취임 1주년 때 모두 법원에 출석했을 정도로 일정의 최우선을 재판에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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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1심 판결 앞두고 재계 긴장감
18일 재계, 법조계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2부는 오는 26일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를 받는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그룹 전현직 임직원·외부감사인 14명에게 1심 판결을 선고한다.
검찰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전후 회계부정 등이 발생했다며 2020년 9월 관련자들을 재판에 넘기고 지난해 11월 이 회장에 대해 징역 5년과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가능성까지 거론하지만, 복합적인 요인들이 판결에 반영될 수 있어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만에 하나 이 회장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더라도 검찰이 불복하면 다시 확정 판결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삼성이 2016년 이후 10년 넘게 사법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재계가 우려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인공지능(A) 전환기를 맞아 ‘모든 책임을 내가 진다’는 식의 선제적인 결단을 누군가 내려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이 회장 외에는 삼성 내에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삼성이 1980년대 반도체 진입 결단 등 산업 전환기 때마다 기회를 잡고 급성장한 것은 오너의 판단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그런데 지금은 사법 리스크 탓에 상황이 그렇지 않다. AI, 핀테크, 디지털 헬스, 로봇, 전장 등에 대한 소규모 투자 정도만 이뤄지고 있을 뿐 조단위의 초대형 M&A는 사실상 ‘올스톱’ 상태다. 삼성은 지난해 8월 삼성바이오에피스가 미국 바이오젠 바이오시밀러사업부 인수에 나섰지만 지금까지 가시적인 진전이 있지는 않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수십조원 단위의 딜은 최고경영자(CEO)선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고 했다. 이 회장이 연초 등에 별도의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는 것도 사법 리스크와 관련이 있다.
이 회장이 재판 부담 때문에 국내에 발이 묶여 있다는 점 역시 문제다. 이 회장이 지난해 5월 공판 일정을 감안해 미국에 무려 22일간 머문 게 대표적이다. 해외 출장을 갈 수 있는 기간을 최대한 맞춰서 일론 머스크, 젠슨 황 등 굴지의 CEO 20여명을 몰아서 만난 것이다. 이 회장은 올해 CES 역시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성리서치를 찾아 연구개발(R&D) 현장을 살폈다. 26일 1심 판결을 앞두고 해외 출장은 부담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재계 일각에서는 AI 전환기 때 삼성이 주춤하는 것은 한국 경제 전반과 직결돼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면서 삼성전자의 실적 기대감이 커지자 올해 경기 회복 기대감이 커질 정도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