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업계에 따르면 인텔이 지난 23일 7㎚(나노미터, 1㎚=10억분의 1m) 공정으로 중앙처리장치(CPU)를 양산하는 일정을 6~12개월 늦춘다고 발표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흔들리고 있다. 인텔이 초미세공정 생산을 외부에 맡기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2위 업체인 삼성전자(005930)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수주를 하지 못하면 오히려 1위 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4월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메모리 초격차를 확대하고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1위를 달성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격변하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 속에서 삼성전자의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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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지난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비트(Mb) D램을 개발하며 메모리 반도체(D램·낸드) 업계 1위에 올라섰다. 그 후로 28년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후발 업체들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아직까지 중국 업체들과의 기술 격차는 크다. 하지만 ‘초격차’ 전략을 유지하지 못하면 언제든 선두 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상존한다. 삼성전자는 중국 업체들의 추격을 ‘새로운 모멘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는 미세 공정 기술 경쟁이 치열하고 가격의 부침이 심하다. 지난 2018년처럼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상승해 호황을 누리는 반면 시장이 침체되면 가격이 급락한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보다 3배 큰 시장인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를 주목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5세대 이동통신(5G)과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의 등장에 따라 더욱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메모리와 시스템을 합친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매출액 순위는 인텔에 이은 2위다. 지난 2017년 1위에 올라섰지만, 지난해 다시 선두를 뺏겼다. 3위 TSMC는 파운드리 분야 절대 강자 자리를 유지하며 삼성전자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상반기 매출액 기준 순위는 인텔(47조6000억원), 삼성전자(36조원 추정), TSMC(25조원) 순이지만 영업이익은 인텔(15조3000억원)이 1위를 지킨 반면 TSMC(10조4000억원)가 삼성전자(9조3000억원 추정)를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큰 판이 분명 흔들리고 있다. 그 위에서 맹주 노릇을 했던 인텔은 생각보다 훨씬 심하게 휘청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이 같은 거대한 변화에 걸맞는 전략적 포지셔닝을 이뤄낸다면 그동안 기대 이하의 성과를 보여주기만 했던 삼성 파운드리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정도의 좋은 성장 궤도에 진입할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인텔 물량 수주하는 TSMC와 격차 확대 우려
안진호 한양대 교수는 “인텔의 문제는 공정이 아닌 설계에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인텔이 삼성전자에 위탁 생산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TSMC가 인텔 물량을 가져갈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인텔의 경쟁사인 AMD는 약 6개월 전부터 TSMC에서 7㎚ 공정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인텔이 삼성전자와 손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TSMC가 인텔 물량을 가져간다면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와의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반도체를 파운드리에 맡길 것이라는 가능성은 이전부터 제기됐다”며 “인텔이 TSMC와 손잡는다면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투자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삼성전자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핵심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결국은 인재 육성이 답이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현장 경험이 있는 우수한 인재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