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이시애의 난(세조 13년·1467년)은 조선을 뒤흔든 쿠데타였다. 함경도 호족 이시애가 중앙집권에 반발하고 사실상 조선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시도한 일이다. 내전에 가까운 전투가 발발했다. 세조는 난을 제압하기 위해 조카 남이를 장군으로 임명해 선봉에 세웠다. 남이 장군은 조선 태종의 외손자이자, 17세에 무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난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남이 장군은 세조의 신임을 얻어 병조판서에 임명됐다. 그의 나이 26세로 역대 최연소였다.
| 남이섬(사진=한국관광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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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물러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남이의 입지는 좁아졌다.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으니, 주변으로 밀려난 공신들의 시기와 견제가 거셌다. 남이 장군은 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급기야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함께 난을 제압했던 동지였던 유자광의 모함 때문이다. 유자광은 남이 장군이 자신에게 쿠데타를 암시하는 말을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남이는 즉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하지도 않은 역모를 시인했다. 능지처사(거열형)돼 세상을 떠났다. 향년 28세였다.
남이가 떠나고, 도성 근처에 있던 그의 생가는 빈집으로 방치돼 폐가가 됐다. 먼저 부인을 보내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남은 가족도 흩어졌다. 아울러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가 살던 집터에 원한이 서렸다고 여겨 흉가 취급을 당했다.
훗날 무고함이 밝혀지고 복권됐다. 순조 때인 1818년으로 세상을 떠난 지 350년이 지난 후였다. 남이탑(사당)이 생기고 나서 동네 이름은 남이탑골, 한자로 남미탑골로 불렀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현재는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에 속해 있다. 연건동은 조선 시대 행정구역이던 연화방과 건덕방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다. 그의 생가는 현재 연건동 72-24에 남은 표지석으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남이의 흔적은 서울 용산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용산구청은 2016년 관내 효창원로 일부를 남이장군로(路)로 지었다.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 언덕에 남이장군사당이 있고 매년 그를 기리는 제가 열린다. 이를 계기로 용산구가 남이장군의 애국 정신과 국난을 극복한 업적을 기리고자 도로명을 지은 것이다. 공식 행정지명은 아니고 명예지명이다.
강원 춘천시에 있는 남이섬도 남이 장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남이 장군이 남이섬 북쪽에 묻혔다는 구전에 따라서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남이섬에는 남이 장군이 없다. 실제로 남이섬 안에는 남이 장군 묘가 있지만 가묘(假墓)다. 남이 장군의 진짜 묘는 경기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