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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러질 듯한 마지막 포옹…무엇을 위한 전쟁인가[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12>

▲들라크루아·고야·콜비츠가 들여다본 '전쟁터'
들라크루아, 종복 죽이는 패국의 왕 권태롭게 묘사
고야, 나폴레옹군 양민 학살 장면 적나라하게 그려
콜비츠, 생명보다 귀한 전쟁 명분 있나 붓으로 물어
  • 등록 2021-11-27 오전 12:01:01

    수정 2021-11-27 오전 12:01:01

케테 콜비츠가 1903년 제작한 판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화가면서 20세기 독일 대표 여성 판화가였던 콜비츠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비극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테마의 연작을 많이 발표했다. 특히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반영한,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대변하는 반전포스터 등을 제작해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알리고자 했다. 색을 빼버린 채 검고 희거나 회색만으로 남긴 굵고 강렬한 선이 특징. 에칭으로 제작한 작품은 마치 목탄으로 그은 데생 같은 분위기로 아이 잃은 한 어머니의 절절한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 종이에 에칭, 42.5×48.6㎝,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학예연구관이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지금도 우리는 전쟁 가운데 있다. 한반도야 말할 것도 없이 긴 휴전 속에서 세계 강대국들의 힘이 보이지 않게 충돌하는 상태고, 가깝고 먼 나라들의 전쟁 소식 역시 끊임없이 들려온다. 디지털미디어의 발달로, 개인의 SNS로 전쟁 현장은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데, 대부분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시선이다. 피가 나도록 얻어맞거나 총소리가 난무하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외부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과 영상을 송출한다. 이토록 어렵게 전한 사진과 영상을 받고도 ‘좋아요’를 누르거나 퍼나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자괴감에, 이조차 관음증이 아닌지,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도 한다.

사진이나 영상 매체가 발달하기 이전 화가들은 과거 역사 속 전쟁터를 상상해 그리기도 하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장을 그리기도 했으며, 때로 군인의 신분으로 경험했던 일을 고통스럽게 회상해 그렸다. 세계를 아름답게 보는 것에 익숙한 화가의 시선으로 상상하거나 목격해 그린 전쟁의 장면은 대부분 참혹하고 끔찍하다. 하지만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몰락을 그린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그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모호한 작품이다.

상상으로 그린 전쟁과 현실의 전쟁, 그 간극

고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궁은 적에게 포위된 상태다. 이때 왕이 내린 결정은,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서둘러 피하고 나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 내 왕국이 멸망하고 나도 죽게 생겼으니 내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을 다 죽이고 좋은 것은 모조리 불살라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에서 사르다나팔루스왕은 그림의 왼쪽, 높은 침대 맨 끝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팔로 머리를 괸 사람이다. 그림의 크기가 가로 5m 세로 4m에 이르는 대작이기에, 사실 이 그림을 실제로 대하면 첫눈에 사르다나팔루스왕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어렵다. 더욱이 컴컴한 위쪽 구석에서 난리가 난 현장을 심심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란 제목이 무색하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그림에서 가장 밝게 그려진 벌거벗은 두 여인이다. 이 광란의 살해현장에서, 한 여성은 코끼리 머리조각이 있는 왕의 침대에 엎드려 이미 죽음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 여인은 그림 아래 오른편에서 근육질 남성에 의해 한팔을 뒤로 잡힌 채 단도에 목을 찔리기 직전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역동적 동작과 격정적 표현, 강렬한 색을 입은 인물들이 주도한다. ‘폭발적 상상력’이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사르다나팔루스왕’이 대표적. 머리보다 눈을 현혹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주도하며 전쟁마저 감미롭게 바꿔놨다. 피 한 방울 없이 붉은 물감과 꿈틀대는 곡선만으로 잔인한 폭력의 완결판을 보여준다. 캔버스에 유채, 392×496㎝,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그림의 구석구석에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피하려는 사람과 숨어 있는 사람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죽는 자와 죽이는 자가 모두 사르다나팔루스왕의 신하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여인을 죽이고 자신도 그 칼에 죽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평화롭게 지켜보는 왕의 시선은, 혹시 그림을 그린 들라크루아의 시선, 혹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시선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왕국이 패한 것을 인정하고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왕의 입장이라면 자신이 누리던 그 어떤 것도 적국의 손에 넘겨주기 싫었을 수 있다. 그래서 온갖 보석과 화려한 왕궁을 불태울 수 있겠다. 삶의 마지막 국면에서 허둥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이 광경을 구경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왕이 전쟁을 이토록 즐기는 듯한 모습으로 그린 들라크루아의 회화적 열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아주 먼 고대, 그것도 내 나라가 아니라 이집트 북부 어디쯤에 있는 나라라고 했을 때, 이 전쟁은 처참하지만 흥분되고 격정적인 낭만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전쟁을 몸소 겪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의 ‘1808년 5월 3일’(1814)에서 죽음이 닥친 순간에 대한 묘사는 그 어디서도 낭만적인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1808년은 스페인이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은 해다. 옆 나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깊이 공감했던 고야는 궁정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주둔이 또 다른 해방의 길인 것으로 착각했다. 당시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에 불만이 많았던 스페인인들도 정치적 개선의 과정일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외세의 침공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폴레옹은 곧 자신의 형을 스페인 국왕으로 앉히면서 본색을 드러냈고 스페인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 동요는 각 지역의 투쟁으로 이어졌고, 그 시작 지점에 고야가 그린 대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1808년 5월 2일과 3일에 걸쳐 프랑스군은 외세에 대항해 들고 일어난 스페인 양민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2일에 마드리드 시내에서만 300여명이 총칼에 사망했고, 밤새 또 다음날까지 붙잡힌 스페인 양민 수십명이 차례로 처형당했다. 동트기 전에 행해진 처형 장면을 고야는 마치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그려내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1808년 5월 3일’(1814). 왕족 초상화를 주로 그리는 궁정화가 출신인 고야를 변화시킨 건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이었다. 심한 정신적 충격 탓에 화풍은 절망과 공포가 스민 ‘검은 그림’으로 바뀐다.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고야의 가장 선명한 선전그림으로 꼽힌다. 전쟁의 공포에 떠는 인간의 참혹한 모습을 그림 중앙의 등불에 비춰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나폴레옹전쟁의 진실을 폭로한다. 캔버스에 유채, 266×345㎝,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


그림에서는 나무막대기 하나 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프랑스 군인 여러 명이 일렬로 서서 총을 겨누고 있다. 이미 총을 맞은 이들은 화면의 왼편 아래에 쓰러져 있다. 중앙에 등불을 밝혔지만 총을 겨눈 이들은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불빛이 환하게 밝힌 것은 곧 총을 맞고 죽게 될 사람들의 얼굴뿐이다. 특히 양팔을 번쩍 든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는 등불보다 더한 발광체처럼 보인다. 마치 고야는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흰 셔츠의 사람에게 집중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총을 든 자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자가 서로 마주 보고선 이 순간에, 멈춰달라고 말하는 흰 셔츠의 남자는 무고하게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를 연상시킨다.

이념과 종교와 민족의 탈을 뒤집어쓴 전쟁의 민낯

전쟁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남긴다. 일생을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주제로 작업했던 독일의 케테 콜비츠(1867∼1945)는 1903년 어린 아들 페터를 안고 거울 앞에 앉아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1903)을 그렸다. 어머니는 죽은 아이의 시신을 온 힘을 다해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있다. 어찌 살아 있는 아들을 모델로 죽은 아이를 그렸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슐레지엔 지방의 직공봉기나 농민전쟁에서 늘 대참사로 이어지곤 하는 약자들의 희생을 일반화해 그린 모자상이었다.

작품은 인류의 탄생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왔던 세상의 모든 전쟁에서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품어 왔던 슬픔인 것이다. 이후 실제로 콜비츠의 아들 페터는 1차대전 발발 직후 불과 열여덟 살에 독일군에 자원입대해 벨기에와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았다. 콜비츠는 죽는 날까지 자식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다. 죽은 아이를 끌어안은 어머니들을 그리고 판화로 새겼으며 조각으로 만들었고, 독일 군인들의 묘지에도 설치했다. 하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슬픔은 독일 군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린 나이에 전쟁에 동원돼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들을 가진 모든 어머니의 것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세상의 무엇에 견줄 것인가.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견뎌 온 이 슬픔은 종국에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전쟁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지도를 다시 그리고, 이념과 종교와 민족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넘어선 명분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작품은 묻고 있다.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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